오늘도 불어 터진라면을 쏟아버렸다

#1의사 하면떠오르는 음식이 있나요?

by Moony

의사라는 직업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있나요? 의사가 아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와인이나 스테이크, 치킨(?) 같은 것들을 꼽더군요. 스카이캐슬은 저도 꽤나 재미있게 봤습니다만, 사실 와인이나 스테이크보다 의사들이 자주 접하는 음식은 라면입니다. 하나 더 꼽자면 커피가 있겠네요. 커피는 음식이라기 보단 마린의 스팀팩이나 자동차의 기름 같은 것이지만요.


저는 지방의 권역외상이자 권역응급센터를 맡고 있는 의과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응급한 중환으로 수술실이 붐빈다는 뜻입니다. 본과 3학년, 다른 말로 의대 5학년이 되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는 "PK"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활보합니다. 간단한 채혈 같은 것들을 배우고 해보기도 하고, 수술이나 시술을 아주 가까이서 참관하기도 합니다. 췌장암으로 쓸개와 십이지장 주변을 다 들어내는 큰 수술에 들어가 반나절이 넘는 시간 동안 시야 확보를 위한 '당기기'를 하기도 하고, 고단한 레지던트 선배들의 단순 노동을 덜어주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수술실이 참 싫었습니다. 저는 워낙 몸으로 하는 일에 젬병이었던 터라, 수술이란 행위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수술은 예체능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외과 계열의 친구들은 수치화할 수 없는 섬세한 손기술의 향연이라 침을 튀기며 찬양하지만, 저는 자신도 없고 관심도 없었기에 수술장은 '경험'과 '학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빡빡한 분위기와 예민한 사람들은 좀처럼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수술실 안에서 해선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수술복을 입고 병원 앞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들이켜는 의사들이 많았다고 하던데, 요즘 병원은 수술 밖에서 수술복을 입는 것에 꽤나 엄격합니다. 물론 요즘 트렌드가 스크럽복이라 불리는 브이넥의 유니폼이긴 하지만, 실제 수술장에 출입할 때에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 원칙입니다. 칼로 열려있는 수술부위는 감염에 취약하고, 때문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저런 이유로 수술방의 휴게실에는 음식들이 즐비합니다.


좋은 병원들은 도시락이나 밥 배달도 된다고 하지만, 박리다매 정신에 투철한 한국의 수술실엔 빵이나 김밥이라도 매일 배달되면 다행입니다. 바쁜 수술실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어가며 병원 식당에 갈 여유 따윈 없으니 각자 편한 방법대로 초코바를 먹거나, 널려있는 음식들을 집어 듭니다. 주재료, 맵기, 국물의 유무 등등 라면의 진화는 수술장에 커다란 선물이 되었습니다.


저는 의대생 6년 내내 자취를 하며 라면을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본디 좋아하지도 않았고, 몸에 좋지 않다는 생각에 부러 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하지만 본과 3학년 시절, 수술방에서는 생존을 위해 라면을 들이켰습니다. 짜장라면, 비빔라면, 보통라면 가리지 않고요. 싼 지 몇 시간이 지난 김밥은 먹고 나면 명절 귀성길의 고속버스 냄새가 나서 거북했고, 빵은 주질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라면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는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라면과 함께 보내고, 시골 동네의 응급실을 지키는 공중보건의사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적게 된 것도 조금 전 라면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큰 컵, 작은 컵의 맛이 다르다는 것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그 라면이요. 자극적인 맛과, 따뜻한 국물이 주는 포만감, 그리고 약간의 배덕감과 치킨보단 낫다는 위안까지. 수술대에 누운 세살짜리 암환자를 옆에서 지킬 때도, 쌍둥이 미숙아를 받느라 대기할 때도 소아과 레지던트가 되고 좀처럼 머무를 일이 없는 수술실에 오랜만에 들어서면 라면부터 챙겼습니다.


영양학적으로 라면이 이렇네 저렇네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 담고 3분, 먹는데 2분. 5분이란 시간 안에 해결 가능한 질리지 않는 끼니다운 끼니가 잘 없으니까요. 더구나 감염 방지를 위해 한껏 에어컨을 틀어놓은 수술방 안은 따뜻한 국물이 절로 생각납니다. 덧붙여 먹다가 환자가 와도, 불어 터진 라면을 버리는 순간이 짜장면보단 훨씬 덜 마음 아프니까요. 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제가 일하는 응급실에 수많은 환자들이 다녀갔고 라면은 탱탱 불었습니다.


스팀다리미에 덴 화상의 죽은 조직을 제거하며 드레싱을 해주고, 기력이 없다며 영양제부터 찾는 저산소증 심부전 할아버지를 애원하다시피 전원보 내다, 백신 맞고 열 이난 다며 뭐라도 해달라는 아주머니를 설득 겸 교육하고 왔습니다. 두 젓가락 정도 남은 라면은 속상한 제 마음처럼 폭삭 식어버렸네요. 이 단락을 적는 동안에도 코로나 검사는 하기 싫다는 감기 환자와 실랑이를 했네요. 심한 말도 많이 들었어요. 화풀이 하듯, 당직실의 수챗구멍에 불어터진 라면을 쏟아버렸습니다.


이만큼 고생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말이죠. 어쩌다 보니 징징대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환자들에게 신선한 야채와 좋은 음식을 많이 먹으라고 하지만 정작 의사들은 귀찮고 바쁘니 스스로의 몸을 홀대하곤 합니다. 농담처럼 병원 최고 골초는 호흡기내과 교수고, 최고 주당은 간 보는 내/외과 의사들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가끔 환자를 교육시키다 보면, 그 잔소리가 절 향하기도 하더군요. 주변엔 우울증 걸린 정신과 의사, 20대에 고혈압, 30대 초반에 대장암 등등 아픈 의사들이 참 많아요.


우리 모두가 표면적으론 돈을 위해 삽니다. 의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전부'는 없습니다. 가끔 병원에 들르셨다가 바쁜 일상에 지쳐 보이는 의사와 대화하실 일이 있다면 한마디 정도 건네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독 라면 냄새가 나는 의사가 있다면 "선생님 바쁘다고 라면 같은 거 드시지 마시고, 식사 잘 챙겨 드세요." 정도만요. 라면 국물에 절여진 매일의 의사와 환자 관계 대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피어날 겁니다. 의사들을 위한 변명 같지만, 매일 노력하면서도 한 명의 힘든 환자를 겪으며 마음에 돌담을 두르는 것이 의사들이라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상의 작은 글감들을 엮어 글을 적어보려 합니다. 환자 혹은 다른 직역의 사람들이 의사에 대해 조금 알아가길 바라며 첫 번째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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