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와중에 한국은?
2025년 말, 세계 질서의 재배열을 읽는 하나의 구조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논의가 뜬금없이 급류를 타고 있다.
뉴스 헤드라인만 보면 마치 트럼프 대통령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혹은 젤렌스키 정부가 “지친 탓에” 상황이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 단순한 것 같다.
세계 질서의 움직임은 개개인 몇몇의 기질이나 전술적 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종전 논의의 진짜 원인은 미국의 전략 변화, 보다 정확히는 대전선을 유럽에서 중국으로 이동시키는 거대한 구조적 전환이다.
우크라이나 종전은 ‘끝’이 아니라 전선 재배치의 출발점이며, 그 여진은 이미 유럽·중국·일본·한국으로 파장을 넓히고 있다.
1. 미국이 지난 4년간 원했던 것은 ‘러시아 제압’이 아니라 ‘유럽의 재동맹화’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유럽의 구조 개조라는 오랜 숙제를 달성했다.
지난 4년 동안 유럽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보였다.
1) 국방비 폭증
NATO 기준을 넘기는 국가들이 줄줄이 등장했고, 독일은 사실상 전후 금기를 깨고 ‘50년 만의 재무장’을 시작했다.
2) 군수·산업의 미국 편중
전쟁 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지금은 미제 무기·미국 기술·미국 정보망에 더 깊게 빨려들어가 있다.
3) 경제안보 체계의 미국 중심 전환
EU의 산업안보 논리 자체가 미국과 거의 동일한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미국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져왔다.
“유럽은 이제 관리비용이 낮아졌다. 남은 자원을 모두 중국 전선으로 돌릴 때다.”
이를 공식적으로 알린 사건이 바로 2025년 11월 25일, 미·우 평화 프레임워크 초안 발표다.
https://www.yna.co.kr/view/AKR20251124023751071
미국은 종전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리스크의 제거에 관심이 있다.
유럽 전선을 닫아야만 본게임인 ‘대중 기술·군사 경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미국의 본심: 평화가 아닌 ‘전략적 여력 회수’
트럼프 대통령이 종전에 데드라인을 걸고 밀어붙이는 이유는 단순할 수 밖에 없다.
언제부터 트럼프가 평화를 원했다고? (노벨평화상이라면 모를까 ㅎㅎ)
심지어 미우 평화 프레임워크 초안을 살펴보면 이거 뭐 푸틴이 작성하고 트럼프가 서명했나? 싶을 정도로 러시아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우크라이나 주권만 보장한다 뿐이지, 돈바스 지역 홀라당 러시아에 넘기고, 우크라이나군을 80만으로 줄이란다. 심지어 나토 가입을 영구금지시키며, 집단방위 방식 안전보장장치에 둔다네?
이쯤되면 진짜 작성자가 푸틴이라고 봐야하는거 아니냐?
지금와서 왜 갑자기 이렇게 우크라이나 전선을 정리해야 할까? 이유야 뭐 뻔하다. 그렇게 해야 미국의 전략자원이 중국 전선을 향해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을 미끼로 미국의 동맹국가들 통제도 쏠쏠하게 할 수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으로 미국 니네 패권국가 맞냐는 의심을 받던 차에, 재건사업을 당근처럼 휘두르면서 패권국가 갑질 제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온거다. 그것도 남의 돈으로.
대만에 4천억달러 부른거, 블러핑 아닐거다. 사실상 최후통첩이지.
https://www.yna.co.kr/view/AKR20251124050000009
미국은 지금 다음과 같은 초고비용 과제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AI 패권 확보
반도체 제조기술 완전 국산화
희토류·광물 수급 재편
해군력 재구축
데이터센터 전 세계 확장
전 세계 정보·감시·정찰 인프라 재정비
이런 거대한 체제 전환에는 단 하나의 방해 요소만 있어도 시스템이 흔들린다.
그 방해 요소가 바로 ‘유럽에서 끝나지 않는 전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본심은 딱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빨리 끝내라. 유럽은 충분히 정비되었다. 다음은 중국이다.”
3. EU의 규제 강화: 유럽이 ‘대중 견제 체제의 규제 파트너’가 된 순간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와 거의 같은 시점에, EU는 외국인투자 규제 강화안을 공개했다.
표면적으로는 “고용·기술이전 의무화”인데, 타겟이 누구겠냐 100% 중국이지.
EU의 이 조치는 단순한 보호무역의 차원이 아니다.
유럽이 스스로를 미·EU 대중 견제 체제의 규범 담당국으로 자진 신고한 거라고 봐야한다.
즉, 중국이 유럽에 공장을 세우고 싶다면:
기술이전 강제
공급망 기여 의무
현지 고용 비율 확대
규제 준수 강화
이거 다 해줘야 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뒷목 잡을 일이다.
유럽과 미국이 명백하게 작전 분담 체제에 들어간 거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미국: AI·군사·반도체·정보기술로 중국 압박
EU: 규제·표준·법률적 장치로 중국 봉쇄
우크라이나 종전과 EU 규제 강화는 “별개”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결국 같은 알고리즘에서 출발한다.
“중국 전선을 준비하라.”
4. 중국의 길항(拮抗): 남반구 자원 블록이라는 ‘역습’
미국·유럽이 규제 블록을 구축하자, 중국은 즉각 자원 블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미얀마, 짐바브웨, 나이지리아 등 19개국이 참여한 녹색 광물 국제 협력 이니셔티브는 사실상 중국판 희토류 동맹이다.
https://www.mining.com/web/chinas-premier-launches-charm-offensive-on-rare-earths-at-g-20/
중국의 목표는 두 가지다.
서방의 규제를 자원 압박으로 상쇄
남반구 국가들을 중국 중심 공급망으로 고착
중국은 기술·금융·규범에서는 서방에 뒤처졌지만, 자원·물류·미들로우 제조에서는 압도적인 글로벌 영향력을 여전히 발휘한다. 이 때문에 중국은 서방의 견제를 맞아도 완전 고립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서방은 위에서 조이고, 중국은 아래에서 버틴다.
2025년 세계 체계의 노골적인 양극 구조가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봐야한다.
5. 일본의 오판: ‘역량 검토 없는 자신감’이 가져올 내적 붕괴의 가능성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가 나오자마자 일본에 나타난 반응은 난데없고 어이없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일본의 개입을 시사한 발언해버린 것이다!
정확한 워딩을 전하자면, 중국이 대만을 해상 봉쇄하는 상황을 가정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중국이 단순히 민간 선박을 늘어놓아 (대만 주변의) 통행을 어렵게 하는 정도라면 '존립위기사태'에 해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군함이 나오고 무력이 행사되는 상황이라면, '존립위기사태'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가깝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격분하고 한국이 경악하고 일본이 어...일본했다.
초임 총리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 신일본회의(日本会議)라는 거대한 우익 이념집단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신일본회의가 보는 세계, 그리고 그들이 꿈꾸는 보통국가로의 회귀는 이렇다.
중국 위기 → 일본의 ‘(전쟁할 수 있는)보통국가’ 복귀 기회
미국-중국 충돌 →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아시아를 호령하려다 미수에 그친) 영향권 확대
대만 해협 폭발 → 자위대를 사실상 일본군으로 재편할 기회(평화헌법 개정)
그러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일본은 실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방위산업 기반 인력 붕괴 : 80년간 야망을 억눌러왔다고 주장하던데, 먼저 그 야망에 동참할 노련한 인력 어르신들 아직 살아계신지 부터 물어봐야하는거 아니냐?
병참 생산 능력 소멸 : 중소 제조업 상당수 해외로 진작에 많이들 나갔고,
조선업은 한국·중국에 압도적 패배, LNG선 하나 건조한다고 엄청 고생한다는 기사 봤다.
전력·기계·반도체 동원 능력 저하 : 라피더스 뭐 힘낸다고 하는데, 그 힘 좀 더 많이 아주 많이 내야할 거다.
청년 인구 절벽 : 이건 우리도 겪어봐서 아는데, 이게 돈과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니까...
일본은 전쟁을 말할 자유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쟁할 체력이 있겠냐?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허상이 퍼지고 있고, 이 허상이 일본 내부의 정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다.
역량 없는 자신감은 외부에 위협이 아니라, 내부를 붕괴시키는 독이 될 텐데, 거의 100년 묵은 야망이라는게 쉽게 포기될 일은 아니라고 본다.
6. 그 와중에 한국: 양 전선 모두를 이해하는 드문 국가(타의로)
가장 묘한 점은, 미국·유럽·중국·일본이 동시에 들썩거리는 와중에 가만 있던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엉겁결에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에 블랙웰 GPU 26만 개를 공급했고(심지어 이미 선적되어 한국으로 오는 중), AWS·Google·OpenAI 등 빅테크들이 한국에 뭔 꿀이라도 발라놨는지, 데이터 센터며 국내 빅테크와 협업하는 등 조단위의 투자 기사가 연일 올라왔다.
심지어 중국은 한국에게 AI 기술 협력 제안(2025년 11월)을 보냈다. 중국의 진짜 의도는 “미국 쪽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메시지다. 언제나 한국에 뭐 요구할 일이 있으면 일단 위협+협박부터 하고 보던 예전과는 다르게, 어떤 면에서는 상냥하게 보일 정도의 제안이어서 기사 읽다가 놀랐다.
https://www.yna.co.kr/view/AKR20251121074900009
중국은 한국을 잃으면 AI·기술·데이터 표준에서 갈라파고스화될 위험이 있다.
APEC 2025에서 블랙웰 26만게 제공에, 미국 빅테크들의 대규모 투자까지 적극적으로 이뤄지면서, 중국의 AI기술은 중국 내부(그리고 극히 일부 친중국가들)에서만 사용되는 내수용으로 전락할 위험이 커지게 되었다.
첨단기술일수록 표준화를 선점하는게 중요한 만큼, 중국으로서는 성질 누르고 한국에 유화적인 제안을 할 수 밖에 없었을거라고 판단한다. (황남빵 맛있었나요, 시주석)
유럽은 한국을 희토류·배터리 파트너로 공식 구분하고 있다.
한국의 강점은 품목 수 자체가 아니라, 이미 국내에 존재하는 이종 산업군(반도체·배터리·조선·철강·기계·통신·데이터센터 등)을 실시간으로 전쟁경제·경제안보 모드로 전환·연계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 속도와 통합성이다. 이 ‘실시간 동원 능력’에서 현재 한국을 따라올 국가는 없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해운
데이터센터
AI·GPU 인프라
철강·화학·기계
통신망… 이거 다 된다니까?
이 모든 것을 전시형 산업체제로 즉시 전환 가능한데, 선진국이고 거기에 민주주의까지 장착한 나라는 내가 알기로는 대한민국 하나 뿐이다.
다른 국가들이 모두 특정 분야에 편중된 반면, 한국은 현대 경제전쟁이 요구하는 거의 모든 퍼즐 조각을 갖추고 있다는게 특이점이다. 즉, 한국은 의도하지 않아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국가가 되게 생겼는데, 이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모를 일이다.
7. 한국의 실제 역할: ‘총을 드는 나라’가 아니라 ‘중립형 병참국’
뭐, 대만에 전쟁이 나면 한국은 자동 참전이라고들 떠드는 무리들이 있던데, 참전이 꼭 총을 들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만 있는건 아니잖아? 총 말고도 할 거 많다.
의료·대피·구호 (이 전에도 잘 해왔던 거다)
해운·항공 기반의 병참
데이터센터·통신 인프라 제공
반도체·배터리·부품 공급
정찰·AI 기술 지원
드론·위성 기반 정보전
즉, 한국은 전쟁을 하지 않아도 전쟁의 70%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구조의 특수성에 있겠지?
미국은 한국 덕분에 아시아의 병참·기술·해상 인프라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GPU와 AI 클러스터를 밀어준거지, 트럼프가 신라 금관받고 너무 기분 좋아서 옛다 선물이다 얘들아! 하고 보내준게 아니란 말이지.
한국은 양쪽 진영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걸 거의 다 가지고 있다. 이런 국가는 세계 전체에서 손에 꼽힌다. 심지어 지리적으로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선의 핵심에 위치한다. 원 세상에...
https://www.yna.co.kr/view/MYH20251117018000038
8. 2025년 말 세계 재편의 세 축
세계는 크게 세 개의 축으로 갈라지고 있다.
① 미국·유럽 축
기술·규제·군사 표준을 장악하며 ‘대중 견제 시스템’을 완성하는 블록.
② 중국·남반구 축
자원·물류·저가 제조를 기반으로 서방의 압박에 맞서는 자원 기반 블록.
③ 한국
미국의 기술 접근 + 중국의 시장 접근 + 유럽의 규제 환경을 모두 이해하는 하이브리드형 산업국가.
이 구조 속에서 한국은 전쟁은 하지 않으면서도 전쟁경제가 만들어내는 수요를 가장 효율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즉, 한국은 ‘중간에 낀 나라’가 아니라 중간에 끼어서 가장 많이 벌 수도 있는 나라가 된다는 거다.
9. 우크라이나 종전은 사건이 아니라 ‘전선 전환의 신호탄’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선을 중국으로 이동시키고 있고, 유럽은 규제로 중국을 조이기 시작했고, 중국은 자원 동맹으로 역공하고 있으며, 일본은 (전쟁) 역량 검토 없이 자신감을 과시하고(신일본회의 영감님들 80년만의 기회에 정신줄을 놓은 듯) 있다.
그 와중에 가만있던 한국은 전략적 가치가 스물스물 올라가고 있어서 흥미롭다.
우크라이나 종전은 전쟁의 끝이 아니다.
새로운 냉전의 시작 신호이며, 그 지도에서 한국은 어느 한 진영의 종속국이 아니라 양 진영의 경첩(hinge) 역할을 하게 될 거라고 본다.
문은 크지만 경첩이 더 비싸다. 경첩이 없으면 문은 존재조차 할 수 없으니까.
2025년 말, 한국은 비싼 경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회를 마주하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