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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록펜 Jun 20. 2019

'기생충'을 보고 - 너는 계획이 있느냐

계획과 무계획 사이, 나는 어디쯤일까.

서늘하고 묵직한 영화였다. 감독의 다른 영화 ‘괴물’, ‘설국열차’보다 덜 희망적이고 더 암울한 결말이어서. 특히 모두가 알고 느끼고는 있지만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계급, 격차에 관한 노골적인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이야기할 만한 거리를 머릿속에 한가득 채워 넣는 영화이기도 했다. 많은 상징과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어 러닝타임 이후의 시간도 영화를 즐기며 보내고 있다(영화를 본 지인들, 유튜브, 독서모임, 지금 글을 쓰는 브런치까지). 특히 나에게 인상깊었던 부분은 영화에서 말하는 ‘계획’이었다.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거짓 학력으로 과외를 하러 가는 아들 기우에게 아버지 기택이 하는 말이다. 영화 속에 ‘계획’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점으로 기억한다. 후에 일련의 사건을 통해 기우-계획 있음 / 기택-계획 없음 의 대비가 드러나고 기우가 계획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였지만, 영화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다른 인물이 기우의 위치를 빼앗았다.




이 비극적인 소동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평생 한 번도 만날 일 없어 보이는 기택 가족과 박사장 가족의 연을 누가 맺어줬을까? 바로 민혁이다. 나는 영화 속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계획의 화신이 바로 민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명문대에 다니고 유학을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여유있는 집안출신이다. 그가 대학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4수생 기우에게 과외를 알선해주는 이유는 불쌍한 친구를 위해서 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해서다. 애정결핍이 있는 애인(이자 학생)을 맡기기에 자신과 비슷한 대학 동기들보다는 여러 면에서 자신보다 모자라고, 언제든 약점을 틀어쥘 수 있는 기우가 적합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선의 계획을 세우고 유학을 떠난 셈이다. 영화 속 모든 사건이 다 잘 풀렸다 한들-기택 가족과 지하실 가족이 평화롭게 공존을 택했다 하더라도-유학 생활이 끝났을 때 주도권은 민혁에게 있다. 기택 가족 전체의 약점을 잡고 빌런‌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민혁의 계획이 기택 가족에게 깃드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수석이다. 수석이 집으로 들어온 후 기택 가족은 계획을 세운다. 기우는 재학 증명서를 위조하여 명문대생이 된다. 기정은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라는 노래를 외우고, 구글링을 통해 미술 선생님이 된다. 팬티와 복숭아, 피자 핫소스 등(참 다채롭게도 써먹었구나…)을 이용한 끝에 기택 가족은 모두 박사장 집에 취직하게 된다. 여기서 끝났다면 계획 성공! 하지만 비슷한 계획을 가진 다른 가족, 문광 가족과의 공생에 실패하면서 성공한 줄 알았던 계획은 깨어지고, 비극이 시작된다. 


수재민이 된 기택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한다. 최고의 계획은 무계획이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고. 


기택의 말에서 연애와 출산, 결혼, 내 집 마련 등을 포기하는 우리 세대를 떠올리는 건 과장일까? ‘N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취업난, 과도한 경쟁 등을 이유로 결혼, 출산, 취업, 인간관계, 심지어 건강(!)까지 삶의 요소를 하나 하나 포기하는 20~30대를 일컫는 말이다. 상술한 삶의 요소들을 갖추는 데에는 일정 수준의 경제력이 필요하고,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계획이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한 경제력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은 치열하니 계획 자체를 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다(지하 벙커에 쌓여 있던 콘돔 껍질을 떠올려보자).


영화 말미에 기우는 수석을 계곡에 돌려놓고, 돈을 벌어 저택을 사겠다는 ‘계획’을 말한다. 그러나 실현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영화는 계획을 실현하여 아버지와 재회하는 기우를 보여주지만, 그 반대편에 아버지와 닮은 삶을 사는 기우를 떠올리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다. 나의 위치는 그 사이 어디쯤일까? 무거운 질문을 속에 묻고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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