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독후감을 시작하며
안녕. 이 글을 네가 읽고 있다는 건, 아빠가 오래 준비하고 계획했던 게 이뤄졌단 거겠지. 아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네가 읽는 건 감히 ‘기적’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아. 셀 수도 없이 많은 좋은 이유가 있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거든. 그 많은 이유 하나하나에 감사한다. 특히 너의 엄마에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너는 아빠와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아. 아빠가 문과라서 빛이니 에너지니 운동이니 하는 걸 잘 모르지만, 사람의 66% 정도가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과, 물이 자연에서 순환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구름이었다가 비가 되어 내렸다가, 강이 되어 흘러서 바다가 되었다가, 다시 구름이 되었다가. 그러니까 지금 너는 세상 어딘가에 물의 모습으로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커피잔 속이나 계곡이나 해수욕장에.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눈이 되어 내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말인데 ‘바다’라고 불러도 되지?
너의 많은 부분이 물이니까 꼭 바다에 가 닿을테고, 아빠가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거든. 글을 읽는 너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겠지. 미리 약속할게. 엄마와 의논해서 아름다운 이름을 너에게 주기로. 그리고 누군가의 언니이거나 오빠, 동생일수도 있겠네. 네가 외동이 아니라면, 아빠와 고모 같은 사이가 되길 바란다. 너와 가장 오랫동안 한살이를 할 가족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너희가 엄마와 아빠에게 실망할 때도 있을거야. 그때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은 너의 형제 뿐이란다.
지금은 바다 네가 태어나기 전이야. 아빠는 스물일곱 살이고, 아직 엄마는 만나지도 못했지.(꼭 만나게 될 거라 믿어) 좀 이상하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름도 없으며 엄마도 ‘아직’ 없는(응?) 너에게 글을 쓰는 아빠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단다.
바다야. 이 편지는 네가 처음으로 “아빠랑은 말이 안 통해!” 라는 말을 했을 때 너에게 보여주려고 해. 아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이게 첫번째 이유야. 아빠는 너에게 이해받고 싶거든. “내가 너만할 땐~”으로 시작하는, 시간에 묻히고 현실에 깎여 불완전한 기억에서 꺼낸 말들로는 아빠의 마음을 다 너에게 전하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미리 쓰는 거야. ‘읽는 너’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쓰는 나’를 이 글이 이어준다면, 너는 아빠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빠가 되기 전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꿈을 가졌고, 어떤 고민에 시름하고, 어떤 것을 좋아했고 또 싫어했는지, 어떤 사람을 사랑했고 어떤 사랑을 했는지. 아빠는 아빠가 읽었던 책을 통해서 너에게 아빠를 알려주려 해.
당신이 읽은 책은 당신 그 자체다
지금의 아빠를 만든 책들을 너에게 알려줄 거야. 같은 책을 읽어도, 인상깊었던 부분은 사람마다 다른 경우가 많아. 사람마다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그 사람에게 녹아 들어 그 사람의 고유한 일부가 되는 거지. 아빠에게 깃든 책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함으로써, 글을 ‘쓰는’ 지금의 아빠를 고스란히 저장해서 글을 ‘읽는’ 지금의 너에게 전하려 해. 이 글 역시 너에게 녹아 들어 너의 일부가 되겠지. 그 모양이 아름답고, 그 온도가 따뜻하길.
두번째 이유는, 너에게 깃든 나의 글들이 너에게 힘이 되어 주길 바라기 때문이야. 아빠는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갈 준비를 지금부터 하고 있단다. 하지만 넘어진 뒤에 스스로 일어나야 할 때가 있듯, 네가 처한 어려움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할 때가 있어. 그때는 아빠가 무슨 말을 해도 너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몰라. 그때, 아빠의 글이 너를 일으켜 세워 주길 바란다. 아빠가 오랜 시간을 산 건 아니지만, 우리가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이미 누군가가 겪은 것이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겪어낼 것이라는 것을 안다. 책이란 어쩌면 우리보다 먼저 그 문제를 마주한 이들이, 우리를 위해 남겨 놓은 기록일지도 몰라. 아빠는 그 기록들에서 좋은 구절을 찾으면 수첩에 옮기는 습관이 있어. 그 문장들을 너에게 전해줄거야.
아빠를 감동시킨 문장들이 너에게도 같은 일을 해 주길 바란다.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할 때, 자신 있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주길 바란다. 세상이 너를 알아주지 않을 때,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굳건한 지지대가 되어 주길 바란다. 사랑이 떠나고 마음이 한없이 저 아래로 가라앉을 때,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해돋이가 되어 주길 바란다.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그 사람을 믿은 너 자신까지 미워하지 않도록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주길 바란다. 네가 수학 공식을 단 하나도 외우지 못해도 괜찮다. 아빠는 다만 네가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곁에 두고 위로 받을 수 있는 문장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 아빠가 그런 것처럼.
쓰는 지금은 2018년 3월 13일이야. 오늘 동아리에 지원한 신입들 면접을 보는데, 옥석을 잘 가려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네가 읽는 지금은 언제일까. 너는 어떤 이유로 말이 안 통한다고 했을까. 아빠는 굉장히 이르지만 벌써부터 궁금해. 어때, 아빠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니? 그러면, 우리 치킨 먹으면서 얘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