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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록펜 Mar 27. 2018

나의 친구론(論)

친구가 기억하는 것


    한 달쯤 전에 졸업식이 있었다. 배움이 모자라 학교에 오래 남아있는 나에게 졸업식은 매번 성가시게 찾아오는 또다른 예비군 훈련이자, 해가 갈수록 불편하게 맞이하는 새로운 명절이다. 그럼에도 학교로 간 것은, 가장 친한 친구 중 두 명이 졸업하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입대 전에 늘 붙어다녔던 친구, 다른 한 명은 전역 후에 특히 가깝게 지낸 친구. 고맙고 귀한 분들 가시는 길에 꽃도 한다발 안겨드리고, 사진도 한 장 남겨야지. 부럽다 귀한 것들아. 나도 얼른 학교 뜨고 싶다 고마운 것들아.


    비루하고 가난한 늙은 대학생이 따로 줄 건 없고, 떠나는 친구들을 위해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 받은 건 5년 전 군복무를 하던 때였다. 많이 외롭고 또 고달팠던 시절, 이 친구들의 편지 덕분에 힘든 시간 잘 버텨낼 수 있었다. 몇 번을 고쳐 읽으면서 내가 받은 고마움 꼭 돌려주리라, 얘들이 힘든 시간 보내고 있을 때 나도 힘이 되어 주리라 다짐했는데. 그 다짐 잘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펜을 쥔 손에 힘이 더 실렸을까.


    편지 쓰기가 주는 힘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한 줄 한 줄 써내려 가자, 기억 한 구석에 숨어있던 추억들이 벌집을 지키는 싸움벌 마냥 사방으로 날아 퍼졌다. 어색하고 신기했던 첫만남부터, 모르는 문제 때문에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 맞대던 시험기간의 도서관, 뙤약볕 아래 땀방울로 벽화를 그렸던 해수욕장, 고민을 술잔에 털어 넘기던 학교 앞 술집까지. 편지 읽을 친구는 어느새 뒷전이 되고, 편지 쓰는 나 혼자 추억이 담긴 장면 하나 하나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장면 하나. 그 장면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작년 가을이었다. 학교 앞 족발집. 나는 술도 없는 빈 맥주잔을 입에 갖다 대며 씁쓸하게 웃고 있다. 맞은 편엔 말없이 그런 나를 보고 있는 친구. 그때 나는 이별이 남긴 상실감에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언젠가 여자친구와 함께 걷는 나를 본 적이 있다고. 그때 내 표정이 나에게서 처음 보는, 행복한 얼굴이었다고. 그렇게 빛나는 표정을 띄우게 하는 이는 쉽게 만날 수 없다고. 후회하고 있다면 한번 더 연락해 보라고. 다시 여자친구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친구가 했던 말을 곱씹다가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길어낼 수 있었다.


      친구란 나의 표정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매일 거울을 보지만, 순간순간 자신의 표정은 모른 채 살아간다. 친구가 우리에게 중요하고 또 소중한 이유는, 우리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의 표정과 그 표정에 담긴 우리의 감정을 읽어내고 또 기억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수백 장의 사진이 저장된 인스타그램도 감히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는 순간, 같은 설렘을 나눠 담은 친구의 눈동자가 있었다. 목표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해 좌절한 순간, 어깨를 토닥이는 친구의 손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얻어 마음 속에 꽃비가 내릴 때, 축복을 전하는 친구의 미소가 있었다. 사랑이 떠나고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을 때,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의 어깨가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나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친구를 그리워하고 친구를 만날 때 행복해 하는 건, 서로의 표정과 감정을 기억하는 친구와 함께할 때 비로소 우리가 완전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 완성하는 것처럼. SNS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내가 그들을 ‘친구’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기억엔 날것의 내가 없다. 스스로가 만든 포장지에 싸여 자신을 한껏 뽐내는 껍데기가 있을 뿐. 날것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을 떠올려 본다.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의 표정을 그려본다. 그리고 바란다. 앞으로 더 많은, 서로의 표정과 감정이 담긴 퍼즐 조각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기를. 다음에 만나면 표정 이야기를 꺼내 볼까. 그 다음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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