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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Sep 11. 2020

너는 그 날 말끝을 흐렸다

"좋아해"

분명 직설적이고 확실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세 글자가 고백인지 대답인지는 아직은 알지 못했다. 말을 한 사람은 화자이고, 듣는 사람은 청자일 테지만 너와 나의 대화에서는 누가 화자인지 청자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고개를 푹 숙이고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분명 너와의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굳은 침묵이 사이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고요한 숨소리 적막한 시선이 적당히 엇갈리다 너의 턱에난 여드름을 발견했을 때 콜럼버스의 신대륙처럼 놀라운 기분이 들었지만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일뿐이었다.

너와 나는 한 장면처럼 몇 번의 어색한 프레임을 반복하다 어느 순간 돌아간 채널처럼 거리를 걷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코 끝을 스치는 바람은 시큰거렸다.

의미 없는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다시 말했다.

"좋아해 너를"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분명하고 직설적인 확실한 고백이었다. 화자인 '내'가 청자인 '너'를 '좋아한다'라는.



그리고 그 날 어떻게 되었더라.

청자는 그저 스치는 바람처럼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너는 그 날 불분명하고 확실치 않은 단어로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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