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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May 30. 2016

펜의 노래

문명에 관한 짧은 고찰

은반 위를 나비처럼 춤추는 인생은 끝났다

습기가 책상을 타고 올라와 뚜껑에 곰팡이가 슬어도

잉크냄새에 취해 하루 종일 지친 몸을 녹이던 시절은 끝났다    


윈도우에 펼쳐진 푸른 초원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사냥꾼들의 습격

약삭빠른 녀석들이 모니터를 점령하고

도망칠 곳 없어 서랍 속으로 쏘옥 숨어버렸다    


몸뚱아리를 매질하는 타자소리

타닥 타닥

네가 설 곳은 이제 사려졌다고 비웃는 소리

삐비비비 삐비비비    


펜대가 갈라져 쉰 목소리만 내쉬며

잉크조차 굳어버려 마른 눈물을 흘린다

아무리 마른 기침을 내보내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    


여전히 심장은 뜨겁고

따듯한 손길을 원하고 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종이는 복합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뚜껑마저 깨진 펜은 먼지 가득한 서랍으로 던져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서랍 속

펜촉마저 녹슬어 버린 채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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