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대단해
아침 8시 20분, 그가 내게 커피를 건넨다.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갔던 것도 아닌데 그는 나를 알고 있다.
앱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매장에 가면 주인을 기다리는 컵들이 오밀조밀 서 있다. 내 커피를 찾기 위해 분주히 눈을 돌리면 그가 먼저 내 커피를 찾아 준다.
20년 근속 기념으로 음료를 사겠다며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라는 선배의 톡이 왔다. 커피전문점에서 내가 아는 메뉴는 아메리카노 또는 라테뿐이니 고민하지 않고 아이스 라테를 주문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 주문 목록을 보니 생전 처음 본, 별의별 신기한 메뉴가 넘쳐났다.
생소한 메뉴를 읽어보다 "알바생 힘들어. 몇 개로 통일하지."라고 혼잣말을 밖으로 꺼냈다.
이 말을 듣고 입사 22년 차 언니가, "거기는 알바생이 아닐걸? 너 그 남자 몰라? 걔는 어리긴 한데 알바생 마인드가 아니야. 우리가 일부러 비싼 거 시켜준 건데 네가 왜 그래?"라며 웃었다.
이후 나는 모르는 그 남자가, 알바생인지 사장님인지 직원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오가다 사장님이라는 의견이 좀 더 우세하게 대화가 끝났다.
궁금하면 직접 경험해 보면 된다. 앱 설치를 하고 아이스 라테를 주문했다. 10분 후 들렀더니 내 이름이 적힌 커피가 맨 앞에 바로 보였다. 인사를 하면서 말로만 듣던 '사장님'을 빠르게 살폈다. 20대처럼 보이는 댄디한 헤어, 단정한 외모와 매너가 호감형이었다.
다음날도 비슷한 시간에 커피 주문을 했다. 메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바꿨다. 그날은 특히 바빴는지 내가 도착했을 때 커피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사장님'은 나를 보자 "이거 가져가세요."라며 이미 나온 다른 커피를 건넸다.
다음 주에는 휴가도 있고 다른 프랜차이즈 커피쿠폰을 사용하느라 '사장님' 매장에 가지 못했다. 일주일 후 다시 들렀을 때, "0000번 맞으시죠?"라며 줄지어 놓인 컵들 중에 내 커피를, 그가 콕 집어주었다.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서면 '사장님' 음료가 수 십 개의 책상 곳곳에 놓여있다. 매장 안에서도 같은 팀, 같은 층 직원들을 만나는 게 예사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얘기를 한다.
"그 남자는 정말 신기해.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기억하지?"
지금은 없어진 회사 건너편 백반집에서 비슷한 사장님을 본 적이 있다. 좌식 테이블이 50개가 넘는 곳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누룽지, 떡볶이, 전, 나물, 찌개, 생선 등 신속하게 한 상이 차려졌다. 배불리 먹고 일어서면 사장님이 신발장에서 쏜살같이 신발을 찾아 내 앞에 내주셨다. "사장님은 이 많은 신발을 도대체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첫 번째, 손님이 들어오면 전체 이미지로 신발을 기억하기.
두 번째, 손님이 신발을 벗어 놓으면 가지런히 모아 신발장에 넣으면서 기억하기.
세 번째, 손님의 식사가 끝날 때쯤 cctv를 보며 확인하기.
이렇게 세 가지 가설을 세웠는데 한가할 땐 물론 가능하겠지만, 직장인이 붐비는 점심시간에도 척척 찾아내는 건 재주라고 인정할 만했다.
금요일 출근길, 전철 두 정거장 전에 커피를 주문한다. 오늘도 매장에 들러 그에게 인사를 하고 그의 관심과 배려를 전달받았다.
회사로 걸어가면서 한 달 이상 돌봄 휴가 중이었던 같은 파트 언니를 만났다. 그녀는 나와 같은 컵홀더의 커피를 들고 있었다. 언니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먼저 말했다.
"오랜만에 갔는데 나를 딱 알더라. 그 남자는 정말 대단해."
나도 맞장구치며, "처음에는 심쿵할 뻔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사장님이냐고 물어본 사람은 없는 거예요?"라고 답했다.
언니 왈, "내가 물어봤는데 사장 아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