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에 갈 시간. 아이는 혼자서 신발과 씨름 중이다. 출근 시간은 촉박하고, 아이는 자기가 신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엉덩이 하늘로 솟아 올리고 낑낑거리며 발을 넣는 모양새가 귀엽기도 하지만 내 속은 타들어간다.
"나무야, 엄마가 해줄게."
"내가 하꼬야."
기어이 인내심은 바닥나고 구겨진 신발 사이로 집어넣은 아이의 손가락을 빼고는 발을 잡고 신발을 신겼다.
"으앙! 엄마 나빠, 엄마 나빠. 내가, 내가, 내가.... 아앙~~!"
하늘로 솟았던 엉덩이를 어느새 신발장 바닥에 떡 붙이고는 온몸으로 휘져으며 슬픔을 표현한다. 2-3분만 더 기다렸다가 조금만 늦게 가도 되었을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혼자서 신발 신고 싶었구나. 울지 마, 나무야! 엄마가 너무 늦어서 그랬어."
우는 아이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기분 좋게 신발을 신고 신나게 걸어갔을 텐데. 또 엄마 잘못이다. 눈물에 젖어 무거운 아이를 가슴에 끌어안고 한쪽 어깨엔 어린이집 가방, 한쪽엔 내 핸드백을 메고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뛰어야 한다. 그 와중에 지각할까 봐 서둘러야 한다.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달래기도 해야 한다.
"나무야, 엄마가 오늘 못 기다려줘서 미안해. 다녀와서 우리 놀이터 갈 때 나무가 신발 신어볼까?"
"네에! 노이터. "
그제야 울음을 멈춘 나무는 남은 울음을 딱꾹질하듯 삼킨다. 나무의 젖은 볼에 뽀뽀를 해주고는 어린 집으로 들여보냈다.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 생각으로 이미 지나간 일을 잊은 듯했지만 나는 출근길 내내 운전하면서 눈물이 난다. 여유로운 엄마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또 미안하다.
아가들에게 1년은 어른들의 시간과 다르다. 그 사이 나무는 신발을 2켤레를 갈아 신을 만큼. 대나무 마디처럼 성큼성큼 크는 것이 보인다. 5살 나무가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아들의 키는 나를 뛰어넘은 지 오래되었고 언제나 '엄마, 엄마!'를 외치던 아이는 엄마를 잊어버린 듯 긴 사춘기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커튼도 안 젖히고 창문도 잘 열지 않고 아이는 자신의 동굴 속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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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때만 기어 나오는 아이는 도대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무엇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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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누워있는 가로생활자 우리 아들을 보면, 한숨에 땅이 꺼져버릴 듯하다. 빠르게 노크를 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가 쫓겨났다.
"그럴 거면 노크는 왜 하냐고요? 나가라고요."
방문도 꽉 닫은 채 무엇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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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면 매일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이 있었다.
"아, 힘들어. 학교를 또 가야 해."
"너는 학생이 학교를 안 가면 뭐 할 거니? 네가 학원을 가냐, 공부를 열심히 하기나 하냐,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맨날 힘들대. 학교 갔다가 학원 가서 다 된 밤에 들어오는 애들은 어떻겠니?
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아, 짜증나! 쾅!"
'매일 짜증만 내고, 버릇없이 굴고. 아무리 사춘기라고 해도 그렇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어떻게 하루종이 방에서 폰만 들여다 보는 거야?'
아들 방문을 노려보며 혼자서 씩씩거리며 중얼거렸다.
아이가 허송세월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해서 어쩔려고 그러냐고 불안한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꽁꽁 차가워진 방안에서 아이는 지금의 시간을 버티는 것이었다. 아이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을 감당하면서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를 보며 내 어린 시절을 번갈아 보았다. 사춘기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슬며시 왔다가 가버린 나의 사춘기 시절과 비교하며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도무지 내 눈앞에 있는 내 아이가 저렇게 행동하는 꼴을 두고 보는 게 쉽지 않다. 아이의 거친 말, 세모난 눈빛, 무기력한 몸짓. 그 어느 하나 성에 차지 않아서 만나기만 하면 한 소리씩 덧붙이곤 했다. 억지로 무언가를 시키는 것도 아니면서 잔소리로 아이를 몰아붙이곤 했다.
문을 열어젖히고, 소리를 같이 지르고, 아이만의 방에서 끌어내며 억지로 억지로 힘을 주기도 했다. 그럴수록 힘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있는대로 하는대로 두지 않고 엄마의 틀에 가두려는 답답함을 아이도 느꼈을 것이다. 혼자 일어나려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위험한 곳을 올라가는 아이를 막아서고, 신발끈을 묶으며 낑낑대던 아이를 친절하게 도와주면서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로 '참을성 없는 엄마'를 가린 채 기다리지 못했던 그때처럼.
'책을 그렇게 읽으면 뭐하니? 나는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했던 다짐, 다 잊었니? 건강하게만 태어나길 기도했던 그날의 간절한 기도를 잊었니?'
속으로 나에게 쏟아내었다. '너 잘되라고 엄마가 하는 말이야.' 하면서 결국 내 욕심을 채운 건 아니었을까? 키우는 내내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이 맞는지 알기에 기다려주기도 하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하기도 했을 것이었다. 애를 애를 썼던 시간들이 수북히 쌓여 있을 것이었다. 내게 화살만을 돌리지 않으리라. 그동안 애썼다. 조금 물러나서 기다려주자.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동굴밖으로 나와 찬란한 빛의 눈부심을 한껏 받을 준비가 될때까지. 땅에 단단하게 발을 딛고 씩씩하게 걸을 때까지. 늘 응원해주는 엄마, 아빠가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게 용기도 주고, 사랑도 주고 믿어주면서.
얼마 전, 친정 엄마가 며칠 지내시다가 가시면서 내 얼굴을 애처롭게 쳐다보셨다.
"엄마가 며칠 너네 집에 있으면서 속상해서 잠을 못잤어. 우리 딸 속이 얼마나 상할까 싶어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엄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기에 뜨거운 감정이 뭉텅 올라왔다. 감춰둔 눈물을 끝내 쏟아내고 말았다. 엄마는 며칠 머무시면서 사춘기의 깊은 골짜기에 빠진 아들과 이제 막 시작하는 사춘기 딸을 키우며 속앓이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이신 것이겠지.
"이 녀석들, 엄마를 이렇게 속상하게 만들어. 어떻게 키웠는데....
근데 딸냄아, 나중에 시간 지나면 나무랑 봄이가 널 키웠다는 걸 알게 될거야.
부모라는 존재가 그렇다. 거저 되는 것이 없어. 결국엔 자식이 널 키우는 거야.
힘들어도 어쩌겠어. 어디 나가서 사고 안 치고 건강하잖아. 아프지 않고 크는 것도 감사하지.
우리 애들, 이정도면 착한 거야. 맨날 경찰서 드나드는 애들도 많아.
다 크는 과정이야. 다 지나간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러다 너 몸도 상해."
엄마가 하시는 말씀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아파본 사람이 안다고 엄마는 이미 겪어낸 그 시절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엄마의 딸이 얼마나 힘들지 너무나 잘 아시기에 깊은 공감을 해주시고 알아주시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되었다. 그 어떤 것보다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내 곁에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엄마가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속이 끓어오르고 답답한 마음이 들 때 친정 엄마가 해주신 말을 떠올려본다. 기다려주어야 한다. 푸근한 마음으로 안아주고 사랑해주며.
오늘 아침 출근을 하며 나보다 큰 덩치를 하고 구부려 자는 아이를 간질간질 하며 포옥 끌어안았다. 볼에 입술을 대고 쪽쪽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