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까리 기름 심지불에 밤새워 물레 돌린 할머님이 생각난다. 목화솜 먼지에 새집 지은 머리에 놀려주든 친구가 그립구나. 어디를 가시든 따라다닌 할머님의 껌딱지.
자장가 물레소리 잠들게 하고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던 생명줄. 어머님의 모유가 적어 쌀 씹어 암죽 끓여 살려주신 할머님.
"돼지 젖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
기억에 없는 내 말을 들려주신 할머님.
후덕하고 인자하신 할머님의 말씀은 범이고 진리인데
불손한 이 손자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갑니다.
수박을 좋아하시던 할머님. 올해엔 수박 들고 사죄하고 용서를 빌겠어요.
할머니, 할머니!
보고 싶어요.
할머니 제삿날, 손자 철수 올림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돼지 젖을 먹고 싶다고 하셨을까? 금세 새끼를 낳아 퉁퉁 불은 어미 돼지를 보면서 쪼그라드는 배를 움켜쥐고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이어트로 식단 조절을 하는 것이 아니면 없어서 못 먹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다. 나도 시간이 없어서 밥을 거른 적은 있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려 본 적은 없으니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으며 자란 세대들. 그분들의 삶을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그 길고 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분들. 우리 아버지가 그런 세대였구나를 새삼 깨닫는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아버지의 마음은 늘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 같다. 마음속의 고향은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그저 그리움으로도 채우지 못해 못다 한 당신의 효도가 못내 아쉽고 죄송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에게는 할머니가 고향이고 하늘이고 땅이고 엄마이고 아빠였던 것 같다. 늘 뭔가 채워지지 않는 아이의 빈 가슴을 할머니의 보살핌 덕분에 그 자리엔 따스한 온기로 채워지지 않았을까. 뵙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글을 통해 할머니의 품이 느껴진다. 저고리 입고 단정히 올린 비녀 꽂은 할머니의 모습. 그 품에 안긴 어린 아버지의 모습도. 아마도 지금은 아버지의 여자, 영희가 아버지를 품어주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그 시절 최선을 다하셨다고 생각이 드는데도 늘 부모님께 할머님께 죄송하고, 불효한 죄책감을 표현하신다. 당신이 받은 크나큰 할머니의 사랑에 비해 당신이 해드린 것은 부족하다 여기셨기에 그러하시겠지. 형편이 나아졌을 때는 이미 할머니는 돌아가셨으니 당신이 생각하는 효도를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과 죄스러움이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하다.
철수의 엄마 대신 할머니 엄마가 되어주셨던 증조 할머니가 그려진다
새벽같이 나가셨던 엄마,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셨던 할머니 대신 증조 할머니는 아버지의 엄마였다. 그림책 속의 풍경과는 다르겠지만 어린 손주들을 치마폭으로 감싸고 쪼글쪼글 거친 손으로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을 것이다. 매 끼니 챙겨 먹을 수 없는 일상 속에서 말라비틀어진 채소를 넣고 샐 수 있는 만큼의 밥알을 둥둥 띄어서 시래기 죽을 끓여주시면서도 할머니는 정작 드셨을까 싶다.
아빠의 할머니 엄마. 당신에게 너무 소중했던 어린 철수의 할머니 엄마.
증조 할머님께
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손주 철수의 딸 방울이입니다. 할머니의 증손녀예요. 할머니를 뵙고 싶고 사진으로도 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의 모습도 뵐 수 없습니다.
증조할머니!
아버지가 할머니 말씀을 종종 하시곤 하셨어요. 배를 곯던 시절이지만 할머님이 훌륭하신 인품을 갖고 계셔서 그 품 안에서 따뜻하게 자라셨다고요.
할머니,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아빠를 잃은 슬픔보다 집을 많이 비우시는 엄마의 빈자리보다 할머니의 따스함을 먼저 떠올리실 수 있게 해 주셔서요. 그것마저 없었다면 작은 철수는 어찌 되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사랑합니다. 할머니! 당신을 뵌 적도 없지만 아버지를 통해 할머니를 만나 뵐 수 있었고 당신의 마음이 그곳에서 여기까지 빛의 속도로 내달려 제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제삿날, 수박 한 통 상 위에 올리는 날 제 마음도 함께 올리고 싶습니다.
수박을 좋아하셨다는 할머니! 아마도 할머니를 닮아 아빠도 저도 수박을 좋아하나 봅니다. 수박 고리처럼 동글동글 연결된 것처럼 당신이 있는 곳까지 제 마음이 연결된 것 같아서 마음 한켠이 뜨거워집니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 당신의 손자 철수는 여든이 되어 할머니가 떠나셨던 나이보다 많으시지만 여전히 어린 철수의 마음에 가끔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