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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방울 Jan 30. 2024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주말

당연한 줄 알았던 것

"얘들아, 나가자!"

주말마다 달려오는 길이 피곤할 만도 할 텐데, 남편은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아이들이 양말목으로 만든 공을 투포환처럼 날리는 놀이를 하기도 했고, 트렉에서 자전거 시합을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운동장엔 정말 우리만 있었다. 가끔 운동장 걷기를 하는 노부부. 마스크를 쓴 채 조용히 지나가시다가 아이들 노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말을 걸기도 하셨다.

"몇 학년이야?"

"둘이 남매니?"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보는 것이 흔하지 않은 시기여서 우리 아이들은 지나가던 어른들의 기쁨조 아닌 기쁨조가 되었다. 평소 교실에 있으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니, 텅 빈 학교에 아이들 소리는 투닥거리며 다투는 소리까지 귀하고 귀하게 울려 퍼졌다.


금요일이면 보통 선생님들은 주말을 보내러 집으로 가신다. 우리는 반대로 우리 집은 관사이다 보니 남편이 집으로 온다. 금요일이면 나도 불금을 보낼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우리가 이렇게 누려도 되나 미안할 만큼. 창문을 열고 식탁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는다. 연기가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웃고 떠드는 우리네 소리도 같이 나간다.


가끔 지나가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건넨다. 코로나만 아니면 '들어오셔서 같이 드세요!'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땐 같이 밥 먹기도 조심스러운 시기.


우리는 숟가락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고,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좁은 침대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보드 게임을 했다.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소리를 지르고 졌다고 울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뜨거운 금요일을 보냈다. 방 하나는 아이들 책상과 책으로 가득했고 방 하나는 온 가족이 다 자는 공간이었다. 떨어질래야 떨어질 없었던, 멀어질래야 멀어질 수 없었던 공간의 힘. 우리는 그 좁은 곳에서 다 같이 했다. 일어나서 잠자기 직전까지 엉켜서 웃고 우는 일, 일상에서 겪어야 할 희로애락을 좁은 방에서 다 해결했다.

가끔 화가 나면 학교 운동장으로 나가서 트랙을 돌면 저절로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아이들은 나를 시험하는 존재였다. 나의 한계를 드러나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만나게 해주는 아이들. 그 당시 나는 운동장 덕을 톡톡히 봤다.



초등학생이라 가능한 일상이라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불금을 보낸 다음 날이면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근처로 드라이브를 갔다. 동네에는 무엇이 있나. 여기 사는 김에 동네 일주를 시작했다. 찾아보지도 않고 지나가다가 낯선 카페를 들어가기도 했다. 언젠가 가 이 길에 뭐가 있으려나 했던 곳엔 덩그러니 놓인 카페가 있었다. 예술인들이 운영하는 곳인지 곳곳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사람은 없었지만 주문한 파이를 신선하게 구워주었다. 커피와 마시는 파이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아쉽게도 메뉴가 바뀐 듯하다. )


출처 pixabay





관사에서 멀리 보이는 불빛. 너무 높아서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불빛을 따라간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근사한 레스토랑을 발견하기도 했다. 남편이나 나나 계획적이고 치밀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운 좋게 우리는 좋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언제나 성공한 건 아니다. 산길 따라갔다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도 하고, 좁은 산길에 내려오는 차와 만나 진땀을 빼며 후진하고 겨우 지나갔던 적도 있다.


산길을 따라 올라간 곳에서 오래된 사찰을 발견하기도 했다. 고즈넉한 사찰에 물소리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에 풍경이 흔들리면 가만가만 귓가를 스치듯 소리가 마음을 타고 울렸다. 우연히 발견한 장소, 보물 찾듯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발견하는 기쁨이 커졌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쉬다가 놀다가 돌아오곤 했다. 관사 생활이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기에 가끔씩 우리는 위로를 하듯 우리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길을 나서곤 했다. 


 두 시간 차를 타고 나서면 강가에서 배를 타기도 했다.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유명한 맛집을 찾아 맛집 투어를 하기도 했다. 먹는 행복, 쉬는 기쁨, 다니는 즐거움. 소소하게 얻게 된 행복들. 작은 것에도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느꼈던 코로나 시대. 그때는 가족이 무탈하게 일상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알게 해 준 때였다. 밖에서 얻는 즐거움보다 안으로 들여다보면서 느끼게 되는 소중한 일상들을.


친구가 너무 그리워서 울었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맘 편히 찾아뵙지도 못해서 울었다.

서로 안아주던 이전의 시간이 너무 그리워서 울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우리끼리라도 똘똘 뭉치지 않으면 버티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주말마다 끌어안고 엉켜서 생활하면서 오히려 그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관사에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것들을 끌어 모아 누렸다.


당연한 것들
이적

그때는 알지 못했죠
우리가 무얼 누리는지
거릴 걷고 친굴 만나고
손을 잡고 껴안아주던 것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처음엔 쉽게 여겼죠
금세 또 지나갈 거라고
봄이 오고 하늘 빛나고
꽃이 피고 바람 살랑이면은
우린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당연히 끌어안고 당연히 사랑하던 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 힘껏 웃어요

-이맘때 나왔던 이적의 당연한 것들을 들으며 가슴 깊이 아파하며 울었더랬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그런 시절이 아니었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x-mwC70kRFI&t=3s



당연하게만 여겼던 일상들이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을 때, 공기 같던 그 모든 것이 기적이 된다. 더더욱 우리는 더 끈끈해지고 주말마다 가족이라도 온전히 만나는 날이면 완연체가 되어서 삶을 노래했다. 그래서 주말이 더더욱 기다려지곤 했던 것 같다.


햇살이 좋은 봄엔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하늘을 마주했다. 간식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서 아이들은 뛰어놀고 나와 남편은 햇살을 즐겼다. 폭신한 잔디밭에 누워있으면 절로 눈이 감겼다.


관사 앞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다 두고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셨다. (눈가에 깨소금 같은 주근깨와 기미가 더 짙어진 건 이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애꿎은 탓을 해본다.) 동네 꼬마 녀석들이 우리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우리들 공간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은 동네 아이들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놀았다. 배가 고프면 멀리 떨어져 앉아서 피자를 시켜서 먹기도 하고 라면을 끓여 종이컵에 담아 먹기도 했다. 놀다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러 오는 샘터가 되기도 했다.

'우리 집 너무 오픈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넉살 좋은 동네 녀석들에 반해 우리 아이들은 손님이 된 듯 쑥스러워했다. 아이들은 남편에게 '삼촌, 삼촌'하면서 졸졸 따라다녔고, 동네 녀석들과 농담을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출처 pixabay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나고 돌아보니, 힘든 가운데 지금보다 어렸던 나의 아이들과 보낸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자꾸만 그때의 정겨운 풍경을 헤치고 들어가 기억 속을 더듬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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