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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방울 Jan 27. 2024

달갑지 않은 손님

18+1 넌 대체 누구냐?


19금.

청소년 이용불가, 청불을 19금이라고도 한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고?

개인적으로 코로나 19를 19금으로 칭하고 싶다. 절대로 우리 아이들 가까이엔 얼씬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코로나 19. 혹자는 이게 뭐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관사생활의 낭만을 이야기하다가, 3화를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 시작을 이렇게 풀어놓다니. <마당 넓은 집> 마무리에 엄청난 사건의 전말을 예고했었다.


'하지만 그 해. 우리에게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 닥치고 말았다'


맞다.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아이들은 개학하고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지속될까? 처음 접하는 상황에 온 국민이 혼란스러워했다.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원인불명의 폐렴이 집단 발병되면서 시작된 사태.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우한에서 입국한 중국인을 시작으로 한 명씩 코로나 환자가 늘어나고 그로 인한 사망이 발생했다. 누군가에게 옮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위기 경보가 주의에서 경계에서 심각 단계로 점차 상황이 심각해졌다.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며칠 씩 마스크를 쓰기도 하고, 약국에서 줄을 서서 마스크를 구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있어야 할 학교는 텅 빈 채 교실엔 선생님들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아이들을 만나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출근한 사이. 우리 아이들은 화면 속에서는 멀쩡해 보이도록 티셔츠를 입고, 아랫도리는 내복을 입은 채로 수업을 들었다.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 수업에만 잘 참여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들은 전학 와서 친구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학교를 코앞에 두고도 가방 메고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상황. 철부지 아이들은 방학이 길어졌다고 좋아했지만, 나는 앞으로의 일상이 걱정이었다. 온라인 수업은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았다. 아이들과 직접 만나서 할 수 있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으니, 온라인 수업에 적합한 자료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수업 시간은 짧았지만 자료를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온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토끼눈이 되어 선생님들과 서로 다양한 방법을 공유하기도 했지만,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교실에서 외로운 시간이 길어졌다. 한치도 예상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 실제 상황일까 믿어지지 않는 뉴스 보도들. 마스크를 쓰고 누구 하나 기침이라도 하면 움찔하고 뒤로 물러나게 되는 무의식까지 뒤덮은 코로나.


학교는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그 와중에 몇 명의 아이들이 마스크를 벗은 채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아이들. '코로나가 뭐예요?' 반문할 거 같은 아이들. 걱정 없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 해 새 보금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약에 시내 학교에서 있었다면 날지 못하는 아기 새처럼 온종일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올 때까지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 콕 박혀 있었을 아이들. 나는 출근하면서 아이들이 하루종일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두고 무거운 마음으로 새벽에 집을 나서야 했을 것이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아이들에게 뛰어가 식사를 준비해 주거나 미처 가지 못하면 5학년 오빠 초록이가 2학년 동생 봄이에게 계란 볶음밥을 해주기도 했다. 아이들도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보여주려고 한 듯이 라면 국물과 탱탱 불은 라면 건더기가 있는 채로 냄비가 식탁 위를 지키고 있었다. 무언가 휩쓸고 간 듯 물건들은 좁은 집 바닥에 가득 어지러져 있었다. 잔소리가 목젖까지 치고 나오려다가 그래도 뭔가 찾아 먹었구나 싶어서 꿀꺽 삼키기도 했다. 물론 다다다다 터진 잔소리에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지만. 점심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라인 수업 후, 몰래 게임하다가 놀라서 멈춘 눈동자를 마주치곤 했다.


매 시간 통제하고 막을 수 없었기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하고, 약속을 단단히 하며 아슬아슬 코시국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끝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지치는 상황에서도 언제고 아이들에게 달려올 수 있었기에 '다행이야, 다행이야'를 외치면서.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감사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퇴근하면 시간이 여유로웠다. 아침도 저녁도 학교가 말 그대로 코 닿을 곳에 있으니 출퇴근에 허비되는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찍 출근한 적도 없다. 원래 가까운 사람이 지각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퇴근하면서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더 보내거나 단골손님처럼 운동장을 찾아오는 꼬마 아이들과 같이 노는 시간도 좋았다. 아이들에게 사람 만나는 것이 얼마나 귀했던 시절인가. 컴퓨터 화면으로 선생님을 만나고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이미 친해진 아이들 틈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우리 아이들. 대신 넓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면서 아이들은 봄빛에 검게 그을리고, 철봉에 매달려 있느라 팔뚝이 단단해졌다. 초록이는 봄이에게 두 발 자전거를 가르쳐줬고, 아이들은 온 학교 안을 누비며 자전거를 탔다.


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쳐 주는 초록이


마당이 넓어서 좋은 관사. 사실 이 글의 제목은 '마당이 넓은 집 2편'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제 집처럼 십분 활용했다. 아이들에게 관사로 오면서 해 준 말이 있었다.

"집은 좁아졌지만 운동장이 넓은 마당이 넓은 집이야. 우리 집처럼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자."

아이들은 신나게 학교를 누볐다.

그러던 어느 날,

"봄아, 너 잠바 어디 갔어?"

"초록아, 축구공이 안 보이는데?"

"자기 물건을 잘 챙기고 다녀야지."

물건을 잘 챙기지 않는 아이들에게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학교가 다 우리 집이랑 마찬가지라며? 우리 집에 둔 건데 뭐 어때?"

초록이가 하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물건 안 챙긴 것에 대한 반성은커녕, 능청스레 하는 말이 어이가 없어 기가 찬 웃음이 나왔다. 사는 공간이 여의치 않아서 불편해하고 적응하지 못할까 봐 포장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돕고자 했던 말이었다. 한편 아이들이 학교를 내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지낸다는 뜻이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도의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관사예찬론자가 되었다. 남편은 매주 금요일을 기다린다. 함께 보낼 관사에서의 시간.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19는 아직은 '마당 넓은 집'까지 점령하지 못했다. 19금. 널 금지한다. 절대로 오지 말아 줘. 앞으로도 쭈욱. 제발!



( 사진 출처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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