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국 서쪽지역
스탬피드, 카우보이의 땅, 그리고 로키의 관문.
마흔여덟 번째 날
이곳에 온 지 마흔여덟 번째 날이 되었다. 정신없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반면에 한 6개월은 머무른듯하다. 떠나온 이곳은 매우 만족스럽다. 출근길. 시선을 멀리 두면 어디를 바라봐도 나무 없는 잔디 언덕들이 수평선 저 너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렇다고 답답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하염없이 한적하고 조용하다. 평화로운 땅으로 넘어온듯하다.
이 도시의 해는 밤 10시에야 기울고, 그제야 하루가 슬며시 닫힌다.
가만 둘러보니 이 넓은 땅에 사람들이 즐길거리는 운동이 주 재료인듯하다. 어딜 가나 헬스장과 운동시설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좀 헬스장을 다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퇴근하고 보면 이미 문 닫힌 지 오래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자는 마음으로 찬 공기를 마시며 밤에 뛰어나가는데, 멀리서 있는 힘을 다해 뛰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헬스장 미등록 동지가 생긴 것 같아 기쁜 것도 잠시 이 밤에 저런 속도로 뛰다니 좀비 영화가 따로 없다.
졸업식이 여드레째 진행되고 있다.
캠퍼스에 학사모를 쓴 학생들이 보여서 알게 되었다. 3인가족, 4인가족, 10명 이상의 대가족들 등. 국가, 인종 다양하게 여럿 모여 각각 사진 찍는 모습이 한창이다. 흩어진 국적과 피부색, 저마다의 표정. 축하의 방식은 달랐지만 축하라는 의미는 같아 보였다.
연구실로 가는 길에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아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아버지.
날 더운데 밖에서 목이 젓도록 땀을 흘리며 사진 찍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오지랖을 부렸다. 사실 그냥 사진 찍어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못하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그렇게 오래 학교에 있었어도 이런 감정은 자주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무언가 가슴 한 편에 씁쓸하다. 혼자 떠나와서 그런가. 혹시라도 한국에 들렀다 왔었으면 감정 조절이 더 어려웠을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파는데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말에 3초도 안되어 영상통화를 건네 오시는 우리 집 여사님.
당장에라도 손 뻗으면 내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신다. 맛집 구경을 핑계로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연히 가고 싶다. 당장에 집으로 갈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이곳에서 이룬 게 없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이루려고 한다. 목숨 걸고 떠나온 만큼 내 고집이, 나로서 그들을 빛내고 싶은 마음이 세다. 그게 이번 모험의 의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