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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kim Oct 05. 2023

애씀 한 스푼을 담은 음식

나의 첫 한식 접대기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집을 얻을 때까지 연구실 내에 있는 랏지에 살았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연구소는 숲 속으로 한참을 들어가야 있는 곳이었다. 학부생들이 쓰는 기숙사와 다르게 박사들 숙소는 따로 있었는데 화장실이 딸린 3명이 함께 공동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방과 화장실은 따로, 주방과 거실은 공용으로 쓸 수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공용주택, 셰어 하우스 정도로 보면 된다. 나도 집을 구할 때까지 그곳에서 한 달여 남짓 살았다. 


하우스메이트로 해양을 연구하는 브라질에서 온 부부와 지냈고, 그다음으로 식물을 연구하는 유타에서 온 에릭이라는 친구가 들어왔다. 그는 매 여름마다 이곳에 와서 연구를 하는 데다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연구소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밤마다 각종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보니 급속도로 친해졌다. 처음 미국에 와서 어리바리하던 나는 최고의 인싸 에릭 덕분에 많은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음식 이야기가 나왔다. 에릭은 한국음식이 궁금하다고 했다. 


“김치 한번 먹어봤는데 아주 매울 줄 알았는데 괜찮았어. 다른 음식은 또 어떤 게 있어?”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김치는 알고 있지만 다른 음식은 잘 모른다고 했다. 나는 여러 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 기회에 저녁을 한번 대접하겠다고 했다. 형편없는 나의 요리실력은 생각지도 않고. 문제는 나의 요리 실력뿐 아니라 한국 음식을 할 수 있는 재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연구소는 한국마트가 2시간가량 떨어져 있었고 당시 나는 차를 구입하지 못한 상태라 어디를 나가는 것도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내가 대접할 수 있는 음식이라곤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 3종 세트뿐이었다. 


신라면, 짜파게티, 비빔면. 


그렇게 앞 뒤 안재고 지른 나의 입방정으로 나의 첫 외국인 손님 대접이 이뤄졌다. 요리초자인 나는 난생처음 한꺼번에 화구 세 개를 쓰면서 라면 대첩을 시작했다. 세 개의 냄비를 꺼내 동시에 물을 끓이고, 면 넣고 물 따르고 헹구고, 면 넣고 물 따르고 볶고, 면 넣고 팔팔 끓이고. 동분서주하다 보니 미 서부 산이 즐비한 유타에서 온 에릭은 내가 마치 요리사라도 되는 듯, great, great을 연발하며 나를 응원했다. 


각각을 끓일 때 보다 한꺼번에 끓이다 보니 면이 많이 불었다. 그렇다면 플레이팅에 승부를 걸자. 나는 짜장면과 비빔면을 예쁜 접시에 담고, 동양 풍의 그림이 그려진 오목한 그릇에 신라면을 담아냈다. 에릭은 난생처음 본 검은 면과 빨간 면 사이에서 눈동자를 흔들며 사진을 찍어댔다. 


"자 먹어보고 1, 2, 3등을 뽑아줘" 


어찌 되었든 요리 아닌 요리를 마친 내가 말했다. 그는 검은 면은 손이 안 갔는지 빨간 비빔면부터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짜장면, 신라면. 한참 요리조리 맛을 보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1, 2, 3등을 뽑았다. 


“1등은 이 빨간 면, 매운데 또 달달해. 2등은 국물라면. 이건 맛은 있는데 나한테 너무 매워.” 김치를 잘 먹는다던 에릭은 내가 일반적으로 아는 맵질이 외국인이었다. 짜장면에 대한 답은 Interesting이었다. 생전 처음 본 검은 면이라 당황도 했겠지만 내가 솔직히 잘 못 끓인 것도 있다. 짜장면은 더더군다나 면이 생명인데 3개를 한꺼번에 볶고 끓이느라 제대로 불을 보지를 못했다. 어쨌건 그렇게 나의 어이없는 첫 외국인 대접이 끝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에릭이 비빔면을 뽑은 건 내가 함께 얹어 준 삶은 달걀 때문이었다. 


결국 삶은 달걀이 이긴 건가? 싶어 나중에 물어보니 다 맛있었는데 나의 애씀이 한 스푼 더 들어간 것을 꼽았단다. 그래서 달걀을 풀어 준 신라면은 2등이었던 것.

 

나는 "아깝다 짜장면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줬어야 공정했는데"하며 웃었다. 


"언젠가 진짜 짜장면 맛을 보여줄게"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몇 년 뒤 에릭은 자동차 사고가 크게 났고, 1년 가까이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은 많이 회복하였지만 그는 예전처럼 활발히 이곳저곳 갈 수 없는 처지다. 그 사이 나도 연구소를 그만 두어 만나지 못한 채 온라인으로만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지나고 보니 나의 애씀 한 스푼을 알아봐 준 그의 마음이 나의 힘든 외국 생활을 시작하게 해 준 용기였다. 


"Have you filled a bucket today?" 오늘 버킷을 채웠나요?라는 동화책에는 우리 모두가 가진 각자의 버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각자의 버킷을 채워야 행복하고 버킷이 비면 슬프고 우울하다. 나의 버킷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의 버킷을 채워주는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버킷을 채워주면 자연스럽게 나의 것이 채워진다. 에릭뿐 아니라 나의 수많은 인연 가운데 나를 지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의 버킷을 채워주었기에 힘든 외국 생활을 연명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힘들지만 나도 누군가의 버킷을 채우기 위해 애씀 한 스푼을 오늘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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