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다섯 시간을 투자해서 미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무언가 잘못되어 미션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무척 실망하고 심지어 화를 내기까지 한다. 옆에서 그걸 지켜봤던 사람이 그냥 게임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한다. 옆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게임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저 게임'이 아니라 '다섯 시간의 노력과 기대'였던 것이다. 그 '다섯 시간의 노력과 기대'가 무너진 것이다. 마치 회사에서 다섯 시간을 들여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정전이 되어 문서가 날아가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더구나 방이 더 많은 집으로 이사 가면서, 방이 없던 아이에게 방이 생긴다면 그것은 아이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이사는 단지 사는 위치를 바꾸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추억과의 이별일 수 있다. 아이가 살았던 공간은 '그저 공간'이 아니라, '삶의 흔적과 추억들이 쌓여있는 공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없던 방이 생기는 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가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을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절반쯤 부서진 장난감이라도, 아이가 몇 년째 거들떠보지도 않던 장난감이라도, 그것은 아이에게 '그저 장난감'이 아니라 '삶의 기억'이고, '추억'일 수 있다.
'그저 게임', '그저 공간', '그저 장난감'으로 보는 사람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혹은 타인의 감정과 정서를 지워 버리고, 그 위에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덧씌우고 있을 뿐이다.
무언가에 손을 대면 '손때 묻는다', '때 탄다'라는 말을 한다. 그때의 '때'는 물리적인 흔적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물건에는 그 사람의 삶과 정서가 묻는다. 사람이 얽혀 일어나는 현상에도 그 사람의 추억과 감정이 담긴다. 그렇게 물건과 현상에 연결되어 있는 정서와 감정을 읽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의 삶과 추억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따뜻한 사람'이 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중요한 것, 가치 있는 것들도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존재함을 인식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다른 사람은 어떤 모습인지를 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