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3D로 3D 게임을 막 만들기 시작하던 시절에는, 다들 3D를 잘 구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 시절의 프로그래머들에게 인기 있었던 서적에는 각종 물리 법칙과 보이지 않는 곳을 모델링하지 않는 기법, 법선 벡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같은 내용이 잔뜩 실려있었다. 각 회사마다 자체적으로 게임 엔진을 만들어 써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상용 게임 엔진이 등장하고, 상용 엔진을 이용하여 게임을 만드는 것이 대세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게임 엔진의 깊은 부분까지 알고 있는 프로그래머는 프로젝트에 몇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나머지 프로그래머는 엔진을 잘 사용하면 되었고, 엔진을 이용해서 게임을 잘 만들어내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엔진 프로그래머가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로 전향했다.
알파고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직후까지만 해도, AI의 성능이 주된 관심사였다. 신경망이 어떤 작업까지 할 수 있는지, 작업의 성능은 어디까지 향상할 수 있을지에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AI가 비즈니스에 접목되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점차 AI를 이용하여 어떤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지, 어떤 고객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지에 집중하는 쪽으로 넘어갔다. 자체적인 AI 기술이 없이도 큰 비즈니스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필요하면 구매나 파트너십을 통해 기술을 채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기업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기술을 바라보는 입장의 변화는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업계에 몸담고 있는 엔지니어들에게도 중요한 이슈다. 노동 시장의 수요가 크게 변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연봉 수준이나 일할 수 있는 기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리어를 생각할 때, 내 가치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치를 상실할 리스크를 보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남들보다 엔진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프로그래머라면 엔진 프로그래머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도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엔진에 대한 통찰이 특별히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면, 남들보다 한발 먼저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로 전향하여, 엔진을 잘 이해하고 있는 클라이언트 프로그래머라는 가치를 새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자신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버리면 그때는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경영학자 톰 피터스는 직장인들에게 프리랜서의 마음을 가지라고 이야기했다. '기술'보다 '가치'를 보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과거에는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과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했는데, 이제는 월급쟁이들도 자신을 하나의 사업체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자신이 일하는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