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0년 전(B. C. 7세기), 동아시아 동쪽 끝에 있던 제(齊)나라에 한 사내가 흘러들어 온다. 그리고 춘추시대라는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 그 사내는 자신의 군주를 섬겨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覇者)로 만들었고, 일신의 영광을 누린 재상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사내의 인생성공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내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의 말에 주목하려고 한다. “나라에는 네 가지 기강이 있다. 하나의 기강이 끊어지면 기울어지고 두 가지 기강이 끊어지면 위태롭고 세 가지 기강이 끊어지면 뒤집어지고 네 가지 기강이 끊어지면 멸망한다. … 그 하나를 예(禮), 둘을 의(義), 셋을 염(廉), 넷을 치(恥)라고 한다.”고.
요즘 표현으로 바꾸자면 국가를 구성하는 4개의 기축(基軸)이 ‘예의염치’인데, 그 하나라도 무너지면 국가가 기운다는 얘기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씩이나 무너지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세 가지씩이나 없어지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으며 더 이상 모든 기축이 버티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다. 정말 그럴까? 앞서 말했듯이 ‘예의염치’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고 잘 쓰이지 않는 분위기인데 나라가 망하기는커녕 더 잘 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자고 일어나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벼락부자’가 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무슨 망할 일이 있다는 것인가? 위의 말대로 하면 현재 우리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또 사실이 그렇다. 이대로는 망한다.
왜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내가 말한 4개 기둥은 ‘사람답게’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나라의 필수조건이다. 원래 정치란 생명과 재산을 보존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생존과 편의가 보장되는 삶은 ‘좋은 삶’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만들어 주는 통치자를 ‘좋은 군주’ ‘성군’이라고 불렀다. 즉 ‘정치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짐승들도 힘센 대장 잘 만나면 이와 못지않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무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주는 리더야말로 두말할 나위 없는 ‘좋은’ 리더이다. 그것으로 끝일까? 만약 그렇다면 국가의 존재 의의와 역할에 대해서 원시적인 이해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생존과 편의’를 위해 국가 안에서 보호받고 살고 있지만, 동시에 국가 안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또 굳이 예의염치를 따질 일이 있을까?
그런데 그 사내의 말대로라면 짐승과 똑같이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사람의 삶은 곧 멸망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공감하지 못하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삶은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에 끝나버리고 만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산다면 홉스(Thomas Hobbes)가 말했듯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로 결국 공멸할 것이다. ‘예의염치’는 바로 ‘사람답게’ 사는 삶, 즉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함으로써 상대에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사람이 어떻게 가능한지의 필요충분조건을 말한 것이고, 그 사내야말로 ‘사람다운 삶’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내의 이름은 관중(管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