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제갈공명이 감탄한 사내

by 철인이십팔호

관종(?)이 아니다. 관중이다. 그것도 2,700년 전 강태공의 나라 제(齊)나라 재상을 지냈던 인물이다. 우리한테는 바로 우정의 대명사인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인 관씨(管氏) 성을 가진 그 사람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알고 있지 그 사람 이름이 뭔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별반 관심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관포지교라니! 그냥 우정이라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 게다가 친구 맺었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인간관계 맺기 바쁜 사이버 세계에서의 인간관계가 흔해진 판에 굳이 옛적 죽마타고 놀던 친구사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생각할 테니까...


[삼국지] 「제갈량전」을 보면 그 유명한 제갈공명이 늘 자신을 ‘관중’과 ‘악의’(樂毅)에 비유했지만 당시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당연하다. 남양주 시골구석에서 농사짓던 20대 초반의 풋내기가 감히 1,000년 전에 세상을 좌지우지했던 춘추시대 제나라와 연나라의 유명한 재상들을 감히 자기와 비교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겨우 제갈공명과 우정을 나누었던 박릉의 최주평, 영천의 서서만이 장차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당시 시점에서 제갈공명이 촉한의 선주인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시하고 정말 그 계획대로 삼국시대를 만들어 냄으로써 나중에 촉의 승상 자리에 오를지 몰랐을 테니 사람들이 그런 태도를 취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비교대상이던 관중과 악의라는 인물들이 젊은 제갈공명도 선망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제갈공명조차도 자신과 동급 인물로 당대 어떤 사람도 아닌 이미 1,000년 전 제나라-연나라 재상을 지낸 인물들을 소환했다는 것은 분명 그들이 특출난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더 충격적인 것은 관중에 대한 예찬을 가장 먼저 얘기했던 사람이 바로 공자(孔子)라는 사실이다. 공자가 춘추시대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에 대해 평가하자 제자인 자로가 제환공이 자기 형인 공자 규를 죽이고 제나라 군주가 되었을 때 공자 규를 모시던 소홀은 자살했지만 관중은 자살하지 않고 오히려 제환공에게 전향했던 사실을 거론하면서 어질지 못한 사람 아니냐고 비난한다. 그러자 공자는 제환공이 힘으로 누르지 않고도 제후들을 규합해서 질서를 되찾는데 관중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관중을 높이 평가하며, 그런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관중 덕분에 제환공이 춘추시대 제후들을 규합하여 외부의 적들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자 시대부터 중국(中國)과 오랑캐(夷狄)를 구별하는 경계 짓기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한편, 공자의 관점에서는 관중이 중화질서의 유지라는 공적(公的) 임무를 성공한 재상이라는 점이 더 우선시되었던 셈이다.


물론 공자와 제갈공명처럼 관중을 높이 평가하고 감탄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맹자는 제자인 공손추가 관중과 안자의 공적을 맹자가 재현할 수 있는지 묻자 관중을 추종할 수 없다고 불쾌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유가(儒家)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맹자의 자존심 상 존왕양이(尊王攘夷: 주나라 왕을 떠받들며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 했던 관중의 업적과 전국시대의 살벌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자신의 자부심 간 비교를 통해 관중을 낮게 평가한 것일 수도 있다. 맹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관중의 행적을 토대로 한 역사적 평가를 비판적으로 내릴 수도 있지만, 그의 불쾌감만큼 관중의 존재감이 전국시대까지도 상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관중이 누구이고 그가 꿈꿨던 ‘좋은 나라’와 ‘좋은 세상’을 만드는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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