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by 철인이십팔호

항상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써먹는 표현이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교통신호도 무시하고 빨간불일 때 무단횡단하거나 과속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도 눈감아 주거나 양심이 괴롭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래서도 안 된다, 사람이라면. 왜? 사람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짐승이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짐승도 사람만큼 먹고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고, 평생을 허튼 짓 하지 않고 살아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보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무릇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생존’은 의무사항이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짐승조차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마당에 사람이 돼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핑계로 온갖 짓을 다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닌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은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인 셈이다.


모름지기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짐승 수준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이다. 바로 그것이 ‘사람다움’이다. 그러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와 무엇이 달라야 할까? 과연 짐승에는 없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있는 것이 무엇일까? 여기서 핵심은 ‘사람답게’라는 것이 ‘짐승 같은’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즉 ‘먹고 살기 위해서’가 사람과 짐승 모두에게 ‘당연’하듯이, 사람이 짐승과 또 달라야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상대방에 대한 동정심이다.


어떻게 그리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짐승들은 맹수이건 초식동물이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먹이에 일말의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애초에 동정심도 없기 때문에 짐승들의 먹이사냥은 인간의 눈에 잔인하게 보일 뿐 자연스런 본능에 따른 당연한 행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먹이사냥을 못할 정도로 늙어버렸거나 병들어서 굶어 죽어가는 짐승들은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동정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곧 스스로가 사냥당해서 잡아먹히는 순간에도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렌스(D. H. Lawrence)의 시 ‘자기연민’(Self-pity)의 “나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야생짐승을 본 적이 없다. 조그마한 새조차도 얼어 죽어 가지에서 떨어질지라도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구절을 생각해보라! 겨울에 야생짐승이 얼어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산짐승들이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을 것이다. 야생에 사는 산짐승들은 스스로가 추위와 더위를 본능으로 알아채고 미리미리 땅굴에 들어가거나 모여서 체온을 유지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얼어 죽어 가지에서 떨어져 죽은 새라니? 오죽 새답지 못했으면 깃털 달린 새가 얼어 죽었을까?


역설적으로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음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아파서 결국 동료들에게도 가지 못하고 혼자서 쓸쓸히 죽어갔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할지라도 로렌스의 시 구절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얼어 죽는 서글픈 상황에 이른 조그만 새조차도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구이다. 의연함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너무나 가혹한(!) 표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