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렐 마더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2021
*스포일러 포함
이 영화는 두 명의 싱글맘이 주인공이다. 사진작가 야니스(페넬로페 크루즈)는 법의학 인류학자 아르투로(이스라엘 엘레할데)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졌고, 아직 미성년자인 아나(밀레나 스밋)는 성폭행으로 인해 아이를 가졌다. 우연히 같은 병실을 쓰게 된 두 사람은 가까이 지내게 되지만, 각자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이가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패러렐 마더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꾸준히 탐색해온 모성을 다시 한번 다루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는 스페인 내전의 역사와 연관된다. 야니스는 아르투로에게 내전 당시 학살당한 고향사람들이 묻힌 곳을 발굴해줄 것을 요청한다. 영화 후반부는 영화의 주요 인물 모두가 모여 발굴이 진행되는 상황을 담아낸다.
영화는 아르투로의 이야기를 담아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야니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야니스를 벗어나는 소수의 숏은 아나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야니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이며, 할아버지 또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야니스의 가계도는 모계로만 채워져 있다. 두 사람은 야니스의 아이, 다시 말해 아나가 낳았지만 야니스의 집으로 오게 된 세실리아라는 아이의 아버지를 굳이 찾지 않는다. 물론 궁금해하지만, 외모의 닮음만으로만 그것을 확인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모계적 내지는 여성적 역사쓰기를 시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야니스가 발굴해내려는 유해는 할아버지의 것이며, 발굴을 진행하는 이들은 국가기관 내지는 국가의 지원을 받은 준공공기관의 직원들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패러렐 마더스>는 모성적 역사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모성”이라는 것은 부계(父系), 남성, 국가 등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모성은 또한 여성의 자유와 같은 것과도 대립하지 않는다. 아나의 어머니 테레사(아이타나 산체스 지욘)가 뒤늦게 자신의 꿈을 위해 막 아이를 낳은 딸을 두고 지방공연을 떠나는 것은, 비록 아나가 섭섭해할지언정, 반-모성적 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모성을 도구화하는 남성화된 국가와 제도 등의 체계가 테레사의 모성이 발휘될 여지를 제거해왔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적절하다. 알모도바르의 필모그래피의 적지 않은 영화는 모성을 주된 테마로 삼아왔다. 이는 모성이라는 개념을 두고 오랜 기간 누적된 신화를 붕괴하면서도 다시금 쌓아 올리며, 일종의 무중력 상태로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패러렐 마더스>에 이르러 모성 개념은 스페인의 역사와 맞물리게 된다. 이는 가족을 돌보고, 지키고, 희생한다는 지엽적이며 도구화된 모성으로서 그것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초기 이론에서 모성은 여성의 신체와 정신을 옥죄는 것으로 다뤄졌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활발해진 모성과 어머니에 관련한 페미니즘 연구는 모성을 낙인과 속박, 일방적 희생의 도구가 아니라 돌봄이라는 행위를 주축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어머니가 되는 것, 아이를 낳는 것은 이방인을 환대하는 행위이며 우리에게 가까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낯섦과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이 된다.”, “만약 모성을 통해 우리가 낯선 이와 접촉하게 된다면, ‘우리 가족’은 이 넓디넓은 세상에서 우리가 필사적으로 사수해야 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게 된다”라는 재클린 로즈의 글은 일정 부분 타자를 향한 모성적 환대를 촉구하고 있다. <패러렐 마더스>에서 이제 막 성인이 된 아나는 스페인 내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지금 한국의 20대 남성들이 그러하듯,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과거는 자신과 관련 없다 생각하고 있다. 40대로 묘사되는, 그리고 할아버지가 직접적인 피해자였으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야니스의 상황은 분명 아나와는 다르다. 그렇다고 과거라는 타자를 향한 환대를 야니스와 그의 세대만이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고통을 안겨주는 과거를 다시금 떠올리고, 그 당시엔 부모님조차 태어나지 않았던 이들에게 어떤 책임감을 지어 주는 것은 얼핏 부당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다만 과거는 반복해서 새로운 얼굴로 현재에 복귀한다. 이 새로운 얼굴은 가족일 수도, 가까운 친구와 지인일 수도, 이방인과 같은 완전한 타자일 수도 있다. 아니, 이런 나열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것은 뒤엉켜 있다. 그 얽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역사 자체에 대한 공동체의 돌봄이라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비록 불완전하지만, <패러렐 마더스>는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