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rsini interpreta a Blomberg y MacielCorsini interpreta a Blomberg y Mac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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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금요일 관람작
<메두사> 아니타 호샤 다 실베이라 2021
영화의 배경은 보수적인 기독교가 지배하는 브라질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가 구성되고, 교회의 마초 남성 청년들은 자경단을 자처하며 상파울루를 '소돔과 고모라'로 만드는 이들을 직접 처벌한다. 이는 남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나와 친구들 또한 혼전순결을 어기거나, 야한 옷을 입고 파티를 가거나,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인 여성들을 밤길에 습격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수적인 사회가 으레 그러하듯, 여성에겐 이중의 요구가 부과된다.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하지만 교회에서 팝송처럼 만들어진 찬양을 부르며 춤을 추어야 한다. 야한 옷을 입으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보물'이기 때문에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 늦게 퇴근하는 일을 해야하지만 늦은 밤 거리를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것들은 성경에 적힌 문구나 율법이 아니다. 성경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은 이들을 옭아맨다. 심장마비로 쓰러진 목사에게 CPR을 한 것은 마리아나지만, 구조의 공은 옆에서 숫자를 세어 준 성형외과 의사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충동을 누르고, 폭력을 감추고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던 여성들은 한 순간에 포효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포효는 보수 기독교가 만들어낸 사회만큼이나 괴상한 해방감을 제공한다. 하지만 <메두사>라는 영화 자체는 그렇지 못하다. 언뜻 <서스페리아>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은 여성의 춤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그를 타겟으로 삼아 처벌하는 마리아나 일당을 보여준다. 부천영화제에서나 상영할 법한 장르영화의 외피를 둘러싸고 시작한 영화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교회까지 그 기운을 이어간다. 하지만 마리아나의 사촌동생이 집에 도착하고 마리아나 일당에 합류하는 과정이라던가, 마리아나가 얼굴을 다친 뒤 상담받는 장면 등은 건조한 톤으로 다뤄진다. 장면들 사이의 일관성 없음은 보수적인 사회에 살아가는 이들의 혼란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저 정리되지 못한, 일관성 있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성공하지 못한 채 포효하며 영화가 끝나버린다. 때문에 <메두사>는 제목이 내세우는 것만큼 불경하지도, 불량하지도 못하다.
<크레이지 컴페티션> 마리아노 콘, 가스톤 두프라트 2021
여든을 맞은 억만장자가 악명만 남은 자신의 이름 위에 뭔가 업적을 남기기 위해 영화 제작을 추진한다. 노벨상을 받은 소설의 영화화에 황금종려상 수상자인 괴짜 감독 롤라가 투입되고, 세계적인 스타 배우 펠릭스와 예술 그 자체에 집중하는 이반 두 배우가 주연으로 발탁된다. 이 영화는 그들이 영화를 위해 리허설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리허설은 험난하다. 정반대 성향의 두 배우는 계속 충돌하고, 롤라의 돌발행동은 그것을 추동한다. 어처구니 없는 리허설, 가량 두 배우가 받은 상을 분쇄기로 갈아버리면서 허망함을 배우라던지,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을 일삼으며 조롱한다던지 하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마리아노 콘과 가스톤 두프라트의 전작 <우등시민> 같은 영화가 그러했든, 이번 영화 또한 영화 속의 이야기가 영화 자체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가령 영화 속에서 리허설하는 영화 <라이벌>에 관한 롤라와 두 배우의 논의는 변형된 형태로 영화 속에서 벌어진다. 영화 만들기는 이 영화에서 이중적으로 행해진다. 인정투쟁과 자괴감, 예술을 놓고 벌이는 서로 다른 관점의 충돌, 영화 만들기 이면에 놓인 좋지 못한 어떤 것들.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그것들을 조롱하려 한다. 그 조롱이 썩 유의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웃기긴 했다.
<애프터워터> 다네 콤렌 2022
"기적들의 지형이 있다."는 단순한 시놉시스는 영화제 상영작을 둘러보던 관객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는 호수를 연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어느 호수를 찾아 명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1부, 호수에 얽힌 과거의 이야기를 세 사람이 들려주는 2부, 무엇인지 모를 행위를 하는 세 사람을 보여주는 비교적 저화질로 촬영된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호수는 대재앙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며, 지구적 시간의 관점에서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작은 생태계를 구성한다는 초반부의 이야기는 이 영화가 호수를 "기적들의 지형"으로 놓고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다만 영화가 그걸 보여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를테면 호수를 역사 자체가 잠들어 있는 동시에 자연적인 무언가로 상정하고, 그곳을 찾아 명상하고 나체로 수영하는 이들을 보여주며 일시적인 유토피아처럼 다가오게끔 하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의미한지 알 수 없다. 도리어 호수를 기적의 공간, 자연의 공간, 역사의 공간, 유토피아의 공간으로 상정한 뒤 꿈과 같은 이미지들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록 일시적으로 유토피아적 공간으로서 영화의 러닝타임을 끌어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유토피아보단 그것을 그렇게 부르고싶은 사람들이 이미 점유한 공간이기에 끼어들 수 없는 것에 가깝게 다가온다.
4/30 토요일 관람작
<식물수집가> 레안드루 리스토르티 2022
식물을 수집해 건조시키는 식물학자들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어느새 손상된 먼 과거의 필름을 스캔한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식물과 필름, 얼핏 관계 없어보이는 두 존재를 <식물수집가>는 종 자체의 유한한 수명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내려 한다. 지난 500백년 간 수십 종의 식물이 멸종했다는 것과 잘 보관된 필름의 유효수명이 500년이라는 것은 우연에 가깝지만, 레안드루 리스토르티 감독은 과감하게 그 둘을 연결시킨다. 식물 수집가가 식물 표본을 수집하고 건조시켜 보관하는 모습은 필름 아키비스트들의 엄격한 작업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자연발생한 존재고, 다른 하나는 화학적으로 생산된 상품에 가깝다는 점에서 그 둘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무언가를 보관하고 보존하는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건조된 식물 표본의 모습과 오래 보관되어 부식되어가는 필름의 모습은 처음의 이미지를 잃게 된다는 점에서 유사하기도 하다. 건조되어 푸른 색을 잃은 식물은 영화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낡은 필름을 스캔한 영상의 색과 유사하다. 산화되어 흑백마저 잃어가는 필름의 색, 가히 죽음과 멸종의 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색을 이 영화는 쫓는다. 그 때문일까, 필름으로 촬영된 형형색색의 식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주는 감정은 생동감보단 이질감에 가깝다. 언젠가 그 식물은 멸종하고 그 필름은 수명을 다할 것이다. <식물수집가>는 그것을 감안하고 기록과 보존을 이어가는 이들의 영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리어왕> 장 뤽 고다르 1987
이 영화를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체르노빌은 어째서 한 영화에 담기게 되었나? 고다르는 서로 붙지 않는 것들을 접목시키는 몽타주를 시도한다. <영화의 역사(들)>에서 수많은 영화와 회화, 문학과 철학 텍스트에서 따온 이미지에서 본래 맥락을 박탈시켜 자율적 이미지로 탈바꿈하게 한 뒤, 자의적으로 접목시켰던 것과 같은 행위가 <리어왕>을 채우고 있다. "진행", "접근" 등의 텍스트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고다르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목소리가 내레이션내지는 보이스오버의 형식으로 계속 덧씌워진다. 몽타주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발생한다. 오손 웰즈의 <맥베스>처럼 원작의 충실한 각색 같은 것은 고다르의 관심사를 벗어나는 것만 같다. 도리어 그의 관심은 셰익스피어의 개별 작품보단 셰익스피어라는 고유명이 지닌 무언가와 다른 무언가를 맞붙이는 것에 가깝다. 이를 위해 수많은 이름과 장소가 소환된다. 우디 앨런과 레오 까락스가 영화에 등장하고, 르누아르, 트뤼포, 비스콘티, 웰즈 등의 감독들이 호명된다. 체르노빌과 호수의 이미지가 맞붙고, 고야의 그림과 촛불이 맞붗는다. 고다르는 수많은 전선을 머리에 얹은 채 영화에 등장한다. 카메라나 마이크 등에 사용되는 전선을 둘러싸고 등장한 고다르의 모습은 그의 뇌를 거쳐 수많은 이미지, 사운드, 텍스트가 교차하는 <리어왕> 자체의 현시와 같다. 그의 뇌를 끄집어내 그가 생각하는 [리어왕]과 셰익스피어를 물어보고 싶지만,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포악하게 뒤섞인 몽타주의 광란 뿐이다.
<입 속의 꽃잎> 에리크 보들레르 2022
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의 시선은 어느 꽃시장에 멈춘다. 기계화된 꽃시장의 노동이 영화의 절반을 채운 뒤, 다시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단골 바에서 기차를 놓친 낯선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피란델로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는 이렇게 둘로 나뉘어 있다. 기계화, 자동화 된 듯한 꽃시장의 모습은 흥미롭다. 사실 자동화라곤 하지만 사람이 카트를 몰고 바코드를 찍으며 꽃을 기계에 거는 수작업이 동원된다. 기계는 꽃을 포장하고 박스에 담는 일을 하고 있다. 기계와 육체가 뒤섞인 노동을 뒤로 한 채 벌어지는 남자와 낯선 남자의 대화는 기묘하다. 삶과 죽음에 대해, 기쁨의 미스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따라가기 쉽지 않다. 남자는 낯선 남자의 상황에 상상을 덧붙여 묘사하고, 낯선 남자는 그것에 놀라워하고, 따분해하고, 흥미로워하다가, 당황스러워한다. 꽃시장과 미스터리한 대화, 두 가지를 접붙이는 에리크 보들레르의 작업은 얼핏 그가 <레터 투 막스> 등의 전작에서 해온, 서로 다른 장소와 상황의 인물을 붙여 영화를 제 3 지대로 만드는 방식을 이어가는 것만 같다. 다만 이 영화에서 그것은 성공적이지 못하다. 남자는 할리우드 클리셰 속 '흑인 마법사' 캐릭터처럼 미스터리를 쏟아낼 뿐이고, 낯선 남자는 이렇다할 리액션을 꺼내들지도 못한다. 꽃시장의 질서정연하면서도 번잡한 이미지가 주는 시청각적 감흥에 비해, 영화의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대화를 듣고 있자면 내가 영화 속 낯선 남자가 된 것만 같다.
5/1 일요일 관람작
<바바리안 인베이전> 천추이메이 2021
이혼한 뒤 아들을 홀로 키우는 왕년의 스타 배우 문은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한 감독 로저의 부름을 받는다. "인생은 한편의 영화 같다"는 로저의 말에 문은 "홍상수식 영화를 찍으려는 건가요?"라 되묻지만, 로저는 "동남아판 <본 아이덴티티>를 찍으려고"라 답한다. 문은 한 달 간의 무술 훈련에 돌입하고, 훈련의 고통과 함께 자신에 대한 감각을 깨우쳐 간다. 천추이메이가 연출, 각본, 주연을 모두 맡은 이 영화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또 하나의 영화다. 영화는 어느 순간 영화와 영화 속 영화와 영화 바깥에서 관람되는 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들은 뒤섞여 구분되지 않은 채 제시된다. "액션"이라는 외침으로 시작한 영화이기에, 어쩌면 <바바리안 인베이전> 전체가 메타적인 영화로 제시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이 훈련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영화에 접근하는 것에 뒤이어 등장하는, 영화와 영화 속 영화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바바리안 인베이전>은 길을 잃는다. 경계 없이 뒤섞인 장면들 속에서 주인공이 감독인 로저인지, 영화의 감독, 주연, 각본가인 천추이메이의 캐릭터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지점이 아쉽기만 하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김진화 2021
가수 윤시내가 사라지고, '연시내'라는 이름의 이미테이션 가수로 활동하던 순이는 동력을 잃는다. 그의 딸이자 관종 유튜버 장하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윤시내를 찾아 떠나는 순이의 여정에 슬쩍 동참하고, 다른 이미테이션 가수 몇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관심 없던 모녀는 윤시내를 통해 전환점을 맞이한다. 하지만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모녀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유튜버/스트리머에 삶도, 이미테이션 가수의 삶도 막무가내로 활용한다. 영화는 그것들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로 자신을 숨기고 다른 이름, 혹은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야 가능한 직업을 끌어올 뿐이다. 이미테이션 가수 아카데미 장면을 떠올려보자. '연시내'를 제외한 다른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노는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게 그려진다. 장하다는 거기에 휘말려 스마트폰이 부셔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영화의 마법적인 순간, '영화적'이라 부를 수 있을 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는 것만 같다. 그 때문일까, 순이가 '연시내'로서 노래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운시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다른 인물의 무대 장면보다 힘이 잔뜩 들어간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저 그러한 순간, 영화라는 마법이 작동하는 순간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강박만이 감지된다. 더군다나 진짜 윤시내가 영화에 출연하고 있지만, 영화 초반부 잠시 얼굴을 비추던 순간을 제외하면 그가 등장하는 모든 순간은 사족에 가깝다. <윤시내가 사라졌다>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게, 그가 직접 얼굴을 비추는 순간 결국 윤시내라는 '진짜'로 귀결되는 꼴이 되어버린다. 진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가짜로 살아온 삶들은 부정적인 것으로 격하된다. 순이와 장하다가 서로의 삶을 인정하지 못해온 것만큼이나,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지난 20년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다.
<핵-가족> 트래비스 윌커슨, 에린 윌커슨 2021
트래비스 윌커슨의 전작도 가족사에서 미국사로 확장되는 이야기였지만, 그의 존재감 자체가 드러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번 영화는 그와 그의 가족의 모습이 전면에 나선다. 시작은 감독의 어머니 이야기다. 70년대 핵전쟁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던 그의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핵미사일 기지 인근을 여행했다. 핵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란 감독은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리다가, 그 여행 이후로 악몽이 사라졌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 이후 악몽이 되살아났고, 악몽을 없애기 위해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핵-전쟁>은 미국의 고원지대를 여행하는 한 가족의 로드무비임과 동시에, 신냉전이라 불리는 지금 다시 찾아온 핵 위협에 관한 기록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미국사로 확장해온 전작처럼, 이번 영화 또한 개인적인 악몽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더 넓은 이야기로 확장한다. 미국의 국토에 위치한 핵전쟁을 대비하는 시설들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더 나아가 핵전쟁으로 찾아올 수 있는 아포칼립스적 상황에 대한 리포트이기도 하다. 동시에 핵전쟁 대비를 위한 시설이 무엇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총으로 땅을 빼앗아라. 그 땅을 총으로 만들어라. 그 총을 모든 사람의 머리에 겨눠라."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되는 이 문구는 원주민을 몰아내고 땅을 차지한 미국 개척자들을 향한다. 이제 이 문구는 스스로 만들어낸 핵에 자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동시대인들을 향한다. 윌커슨 가족은 미니골프를 즐기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며 가족여행을 즐긴다. 핵 아포칼립스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평화로운 가족여행의 이미지는 핵전쟁 이후의 미국을 배경으로 삼은 게임 [폴아웃]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핵으로 땅을 빼앗아라. 그 땅을 핵으로 만들어라. 그 핵을 모든 사람의 머리에 겨눠라." 총을 핵으로 바꾼 이 문장이 과거의 사건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길 바란다.
5/2 월요일 관람작
<어떤 방법으로> 사라 고메스 1974
쿠바혁명기의 영화들은 꽤나 남성적이다. 토마스 구티에레즈 알레아의 <저개발의 기억> 같은 영화를 떠올려보자. 제3세계의 인민은 모두일지라도, 종종 시민은 노동자 정체성을 지닌 남성에 국한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라 고메스의 <어떤 방법으로>는 이를 인식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인민에 대한,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섞인 영화"라는 영화 스스로의 설명은 쿠바혁명 이후 쿠바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해보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때문에 영화는 배우의 실제 이야기를 끌어오고,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는 건물들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다큐멘터리적인 내레이션을 도입한다. 사라 고메스는 촬영 중 사망했지만, 토마스 쿠티에레스 알레아와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사가 마저 완성한 이 영화는 <저개발의 기억> 등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갈등이 쿠바 사회에 내포되어 있었음을 담아내고 있다. 혁명 이전 도시 주변부에서 살아가던 저소득층은 혁명 이후 도시에 통합되지만 이전에 지니고 있던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교사 사이의 차이가 존재하고, 서로 다른 인종 간의 미묘한 문화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것들은 혁명이 스스로 내파될 가능성을 사회 속에 잠재하게끔 한다. <어떤 방법으로>는 그 잠재성을 탐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전방위적으로 실험한다.
<코마> 베르트랑 보넬로 2022
락다운이 벌어진 파리, 영화는 저화질의 어지러운 화면 위로 2014년부터 만들고자 했던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한 십대 여성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고, 유튜브를 통해 파트리시아 코마라는 여성의 영상을 본다. 그가 꾸는 악몽은 어두운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종종 방의 인형들이 대화하기도 한다. 페이스타임이나 줌으로 친구들을 만나긴 하지만, 비대면의 한계가 역력히 드러난다. 영화를 제작하는데 최악의 시기에 제작된 이 영화는 락다운이 일종의 집단적 코마상태였음을 예증하는 것만 같다. 실외(꿈 속 숲)은 그저 악몽이고, 모든 사람들은 대화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며, 사회에 대한 논평들은 블랙코미디 같고("김정은의 핵 버튼"), 접촉해서 대화하는 것은 인형 뿐이다. 온라인으로나마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은 연쇄살인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분이다. 주인공은 자해의 충동을 느끼기까지 한다. 정신없이 펼쳐지는 유튜브, 줌, TV, 스톱모션 인형극, 애니메이션, 페이스타임 등 서로 다른 화면비와 질감, 스타일의 영상들은 영화를 보는 관객마저 코마 상태에 빠트리려는 것만 같다. 전작 <녹투라마>에서 무계획적으로 백화점을 점령한 십대들의 혼란스러움과 여러 테러, 정신없는 사회상을 병치시켜 무력감을 선사하였던 것처럼, 베르트랑 보넬로는 팬데믹과 락다운 시대의 정신나갈 것 같은 무료함을 선사한다.
5/3 화요일 관람작
<해왕성 로맨스> 솔 윌리엄스, 아니샤 우제이먼 2021
아프로 퓨처리즘은 아프리카/아프리칸 아메리칸 문화와 SF 판타지, 마술적 리얼리즘 등이 뒤섞인 하나의 문학/예술 사조라 할 수 있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솔 윌리엄스와 르완다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아니샤 우제이먼이 공동연출한 <해왕성 로맨스>는 아프로 퓨처리즘 사조를 끌어온 퀴어 SF 뮤지컬을 선사한다. 아프리카 어딘가에 위치한 광산의 채굴 노동자와 얼떨결에 목사를 죽이고 도망치던 인터섹스는 반식민주의 해킹 집단에 합류하고, 새로운 노예제로서 아프리카 노동자를 착취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함께 대항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솔 윌리엄스의 시 "콜탄은 목화다(Coltan As Cotton)"의 연장선상에 놓인 이 영화는 디지털이 아날로그적인 노동착취에 근거하고 있음을, 광물이 노예제 시기의 목화처럼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메타포로 가득하다. 실제 세계가 아닌 공상적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구글과 아이폰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드는 영화의 내용은 메타포를 넘어선 현재로 다가온다. 과거 영화 <슬램>과 여러 음반을 통해 랩과 시 사이에 놓인 음악형식인 '슬램(slam)'을 선보였던 솔 윌리엄스가 맡은 음악이 강렬함을 더한다. 온라인 콘텐츠와 네트워크의 방화벽으로 무장한, 아날로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근거한 새로운 식민주의를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까? 익숙한 형식들을 배제하고 독특한 이미지와 음악을 선보이는 이 영화는 서구 자본주의가 마련한 '정상성'의 틀을 집어 던진다. <블랙팬서>와 같은 작품이 하나의 소망이었다면, <해왕성 로맨스>는 화염병에 가깝다.
*온라인 관람작
<몬티 쥬베이의 삶과 죽음> 김정민 2021
30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20개가 넘는 챕터가 휘몰아친다. 전업주부이면서 사업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아내를 기다리는 완수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사채업자, 환치기가 될까바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하는 중년 남자, 힐링을 위한 장난감을 성인용품으로 제작해 팔아보자는 장난감 제작업체 대표, 완수의 심리상담사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화면을 채운다. 이들의 인터뷰를 담아내고 있는 것처럼 고정된 구도로 촬영된, 그리고 각 캐릭터의 성격과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미쟝센으로 채워진 화면들. 이 화면들은 영화엔 결국 등장하지 않는 몬티 쥬베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묘한 소동극을 담아낸다. 전작 <긴 밤>에서 독특한 긴장감의 호러를 선보였던 김정민 감독은 이번에 독특한 리듬감을 지닌 코미디를 선사한다. 영화가 날리는 무수한 잽 앞에서 관객은 무장해제된다.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 장윤미 2021
장윤미의 작품들은 장소와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번 영화는 카카오맵의 거리뷰 화면과 함께 내레이션이 들려오며 시작된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 그 누군가가 살던 '부근'의 길을 거리뷰로 보고 있다. 그 누군가는 길에서 구조된 고양이다. 장윤미 감독이 얼마간 데리고 있다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 '무수'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살던 부근을 영화는 다양하게 담아낸다. 영화의 제목인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는 '부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다. 대상은 부재하고, 대상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 대상의 부근만을 탐색할 수 있는 상황. 거리뷰를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그 부근을 탐색하는 이 영화는, 결국 부재하는 대상 자체에 다가갈 수 없음을 인정하는 제스처임과 동시에 영화가 수행하는 탐색이 그곳으로 수렴되길 바라는 제스처다.
<낙마주의> 함윤이, 최지훈 2021
연애를 끝내기 위해 인공폭포 앞에서 만난 한 커플은 얼떨결에 인공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을 향해 등산한다. 서로가 주고받은 물건을 교환하자는 원래의 목적보다 두 사람이 함께하게 된 우연한 여정이 앞서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인공폭포의 시작점을 찾아가는 두 사람은 다시 다투고, 다시 화해하고, 다시 서툴어지고, 다시 서로를 돕는다. 거리를 두고 걸어가던 두 사람이 가장 가까워지는 영화 속 순간은 이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할 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한다. 평범한 이야기를 아쉬워할 관객도 있겠지만, 평이한 이야기 속에서 남은 기억할만한 순간 하나가 인상 깊은 단편이다.
<트랜짓> 문혜인 2022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한 조명기사 미호는 트랜스젠더다. 이제 막 배우일을 시작한 아역배우 백호는 현장이 놀이터처럼 느껴진다. 백호는 '삼촌'처럼 보이는 미호가 '이모'인 것이 신기하다. 자꾸만 마주치는 두 사람은 미묘한 상황을 주고 받는다. 여느 일터가 그러한 것처럼, 현장은 스탭과 배우가 유대감을 형성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반복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곳에서 트랜스젠더와 아역배우의 만남은 비일상적인 일을 벌려야 하는 영화 현장에서도 비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트랜짓>은 비일상이라 불려질 수 있는 소외를 미호와 백호의 만남으로 돌파하려 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손이 조명 앞에서 교차하여 그림자를 만들어낼 때, 그 유대감은 촬영장에서 소외되곤 하던 트랜스젠더와 어린이만의 것이다.
<D의 다두증> 마이클 로빈슨 2021
'다두증'은 머리가 여럿 달리게 되는 돌연변이 현상이다. 마이클 로빈슨은 머리가 여럿 달린 사람이 보는 시각성을 하나의 프레임에 옮기려 시도한다. 마치 여러 개의 채널을 동시에 틀어두고 보는 사람처럼, 수많은 이미지가 뒤섞여 영화에 등장한다. 그 이미지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나 <매트릭스> 등의 영화부터 다양한 TV 시리즈, Cardi B나 Lil Nas X 등의 뮤직비디오에 이르기도 한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동시대인이 겪는 모호한 불안감, 우울증, 집단적 트라우마, 시놉시스의 표현대로라면 "심리적 자유낙하"에 해당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감독은 인류가 다두증을 가진 하나의 개체인 것처럼, 동시에 수많은 이미지를 마주하는 사람의 터질 것 같은 뇌를 상영하고자 한다. 이 정신없는 세계의 이미지 속에서 당신이 분해낼 수 있는 이미지는 얼마나 되는가? 다두증을 지닌 인류의 머리 중 하나인 당신의 눈은 어떤 이미지를 보고 있는가?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 마르티카 라미레스 에스코바르 2022
필리핀에서 찾아온 이 영화는 더 주목받아야 한다. 한물 간 액션영화 감독 레오노르는 아들에게 노망난 할머니처럼 대해진다. 어느 날 미완성 시나리오를 보던 그는 TV에 머리를 맞는 사고를 겪고 자신의 시나리오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쓰던 시나리오 속이기에, 그 세계 속에서 그의 존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다름 아니다. 어린 시절 촬영장에서의 총기사고로 죽은 아들은 가족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 레오노르를 이해해줄 것을 요청하고, 사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진 레오노르를 간호하던 아들 루디는 점차 어머니의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 이 영화는 또 하나의 묘기를 선사한다. 당신의 세계가 픽션으로 존재할 때만 오롯이 존재할 수 있다면, 자신이 오로지 그 세계 속에서만 살아있을 수 있다면, 타인은 그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그 픽션은 어떤 엔딩을 맞이해야 하는가? <레오노르는 죽지 않는다>는 거기에 답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살아있는 픽션의 세계가 지닌 타임라인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여주며,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고 손을 내민다.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있을 수 있는 시네필 감독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로 살아있는 누군가의 이야기이기에 이 영화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데블스피크> 사이먼 리우 2021
역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전작 <해피 밸리>에 이어, 사이먼 리우는 다시 한 번 홍콩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기록한다. 다만 팬데믹과 함께 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든 지금, 이 영화가 담아내는 것은 불타오르는 열망의 장소로서의 홍콩이 아닌 열망이 이미 불태워낸 것들을 되짚어 보는 것에 가깝다. 중국은 홍콩스러운 것들을 도시에서 지워내고 있다. 홍콩영화를 수놓던 네온사인 간판부터 시작해, 홍콩의 문화자본이 되었던 도시 경관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데블스피크>를 채우는 영상들은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변화한 도시 이미지의 파편들과 함께, 중국이 지워내려는 홍콩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이를테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와 같은 것 말이다. 압력에 의해 지워져가는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것, 그리고 공통의 기억으로 존재하기에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이 영화에 뒤섞여 있다. 그 순간 이 영화는 추모와 기억의 장소로 변모한다.
<바비 야르 협곡> 세르히 로즈니차 2021
꾸준히 아카이브 속 기록영상을 재구성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세르히 로즈니차의 신작. 이번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유대인 33,771명이 살해당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1941년 9월에 벌어진 이 사건은 나치 특수작전부대 C대 소속 존더코만도 4a 부대의 소행이지만, 동시에 당시 키이우 지역 경찰과 지역민의 협조 하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영화의 중간 지점 즈음에 그 사건이 놓이고, 사건 앞뒤의 사건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를테면 히틀러의 나치가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고 지역민들이 그에 동조하는 모습, 1943년 소련군이 키이우를 탈환하는 모습, 전쟁 이후의 재판 과정과 같은 모습들 말이다. 역시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전작 <위대한 작별>이 스탈린의 죽음을 맞이한 소련 인민의 모습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정치'라는 거대서사의 가장 작은 구성체인 '인민' 혹은 '시민'이라는 미시적인 주체를 탐구했던 것처럼, <바비 야르 협곡> 또한 비슷한 작업을 수행한다. 정치, 전쟁, 제노사이드와 같은 말 속에서 인민 하나하나는 무력한 존재처럼 다가오지만, 결국 인민 하나하나의 선택과 행동이 "저항 없는 학살"과 "전범 재판"을 모두 가능케 한다. 물론 독일 시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나치당은 끔찍한 전범이 되었고, 스탈린을 지지한 소련/우크라이나 인민의 선택은 체제 붕괴와 독재를 불러왔다. 라고 단순하게 말하려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은 아니다. 도리어 정치나 전쟁 같은 거대한 단어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개념이 아니라, 인민, 시민, 국민이라 불리는 미시적인 정치주체들이 항상 눈으로 목격하고 있고 피부로 감지하고 있는 것임을 다시금 짚어주는 것에 가깝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 찾아온 이 영화는 그러한 감각을 되살려준다.
<탱고가수 코르시니> 마리아노 지나스 2021
팬데믹 기간, 영화감독 마리아노 지나스, 촬영감독 아구스틴 멘딜라아르수, 음악가 파블로 다칼이 모여 이그나시오 코르시니에 관한 이야기를 녹음한다. 마리아노와 아구스틴은 관광지로 여겨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의 역사적 장소들, 박물관을 찾고, 파블로는 코르시니의 노래를 동료들과 함께 녹음한다. 이러한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코르시니에 관한 전기가 아니다. 코르시니가 어떤 뮤지션이었는지, 그의 생애는 어떠했는지, 그의 노래는 어떠한지 살펴보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마리아노의 기획은 코르시니를 중심으로 코르시니의 탱고 앨범 [Corsini interpreta a Blomberg y Maciel]이 탄생한, 독재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를 조망해보는 것이다. 아니, 조망보다는 모험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코르시니의 노래를 타임머신 삼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새겨진 비극의 역사를 모험하는 것에 가깝다. 이 영화는 그러한 모험의 기록이다. 코르시니의 노랫말을 단서 삼아 1960년대 말의 아르헨티나 사회를 탐색하고, 역사적 장소와 박물관에서 보물을 찾아내듯 과거를 발견한다. 위대한 대중문화는 한 시기가 그 속에 숨겨진 보물지도와도 같다. <탱고가수 코르시니>는 코르시니의 앨범을 보물지도 삼아 떠나는 모험이다.
<보이지 않는 산> 벤 러셀 2021
르네 도말의 미완성 소설 [마운트 아날로그]에 묘사된 허구의 산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담아낸 작품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의 제목처럼 투오비넨이라는 사내가 찾아 떠난 산은 허구이며 보이지 않는다. 벤 러셀은 없는 것을 찾아 떠난다. 카메라는 계속 걷고, 걷고, 걷는 그의 뒤를 따른다. 헬싱키의 밴드 올림피아 스플렌디드(Olimpia Splendid)의 음악이 영화 곳곳에서 그의 여정과 함께한다. 존재하지 않는 산을 향해 떠나는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여정이다. 이 영화는 없는 곳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투오비넨의 발걸음과 올림피아 스플렌디드의 음악은 '보이지 않는 산'에 결코 도착할 수 없다. 마치 올림포스 산은 존재하지만 그 너머의 신들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투오비넨은 그냥 그 산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은 산이 지구 표면 어딘가에 있을거라" 믿고, 사람들이 "미친놈인가? 농담꾼인가?"라고 말해도 탐험대를 꾸려 떠나겠다고 말한다. 여정의 끝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핀란드에서 시작해 그리스 어딘가에서 끝나는 이 여정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어디선가 멈춰선다. "보이지 않는 산은 보이지 않더라도 거기에 가는 관문은 보인다"는 르네 도말의 글귀는 어느 순간 현실이 된다. 물론 그 산은 영화에 담길 수 없다. 다만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이가 있다면,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 그곳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의 발걸음을 담아낼 수는 있다. 영화 말미에 벤 러셀은 삼각형 모양이 달린 거울로, 그래픽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 그곳을 표현하려 한다. 아니,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에서 그러한 이미지들은 "보이지 않는 산"의 "보이지 않음"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아무렴 어떠한가? 영화는 자신이 담지 못할 무언가로 향해가는 사람이 믿는 가능성을 찍을 수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