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6. 2022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후기

<무첸바허> 루스 베커만 2022

1907년 발표된 소설 [요세피네 무첸바허, 혹은 어느 비엔나 매춘부의 자서전]의 영화화 오디션 공고를 보고 16세에서 99세 남성 100명이 참여한다. 이 소설은 익명으로 발표되었으나, [밤비]의 작가인 펠릭스 잘텐이 저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시간 금서였던 이 포르노그래피 문학은 아동성애적이고, 추잡하고, 솔직하리만큼 더러운 것으로 유명하다. 남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오디션에 지원했다. 한 남성의 분류대로 감독을 존경하거나 영화를 찍고 싶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첸바허]라는 포르노에 끌려서. 오디션을 빙자한 인터뷰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들이 자신의 성적 욕망, 성적 판타지, 성경험, 성관념을 분출하는 장이 된다. 아동성애가 소재인 포르노 문학을 소재로 내세웠기에, 왜곡된 성관념과 성적 판타지를 드러내는 이들이 한가득 존재한다. 물론 이 영화는 그러한 남성들을 모아두고 "꼽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소설 속 10대의 성경험을 보며 자신의 첫 성경험 혹은 성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몇몇 남성들의 말은 꽤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성인 '무첸바허'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의 발췌문을 남성들이 읽는 순간, 그들의 발화는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인터뷰에서 말한 것에 관한 대응물이 된다는 점이다. 더불어 영화 속 유일한 여성인 감독은 외화면에서 목소리로 남성들에게 지시와 질문을 건낼 뿐이라는 점은, 영화 매체가 지닌 남성적 시선 자체를 뒤집으려 한다. 다만 100분의 러닝타임 동안 별다른 형식적 변화 없이 이를 이어가는 영화를 보는 것은 꽤나 지치는 일이다. 

<키이우 재판> 세르게이 로즈니차 2022

감독의 2021년작 <바비 야르 협곡>의 후속작과도 같은 작품. 1942~45년 사이 나치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벌인 학살에 관한 1946년의 재판을 다룬다. 로즈니차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또한 아카이브의 영상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다만 이번 영화는 재구성이라기엔 재판의 경과를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 재판장을 비롯한 판관들을 알려주고, 피고인 나치들의 신상을 보여준 뒤, 이들을 하나하나 심문하고, 학살 생존자인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검사의 구형과 최종변론과 선고를 거쳐, 모든 피고가 광장에서 공개적인 교수형을 당하는 것까지. 영화는 이 과정을 '재구성'했다기보단 재판이 벌어진 순서대로 기록을 나열하고 있다. 감독의 전작을 본 이들이라면 재판의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울 것이다. 물론 재구성되었기 보단 나열된 재판과정을 104분 동안 지켜보는 것은 퍽 지루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키이우 재판>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리고 로즈니차의 영화에서 언제나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한 것은, 기록의 주된 대상인 피고/판관/증인 등이 아닌 이들이 화면에 잡힐 때다. 이들은 피고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증인의 말을 경청하기도, 판결에 환호하기도, 기나긴 재판에 지루해하거나 멍을 때리기도 한다. 스탈린의 장례식을 다룬 <위대한 작별>에서도 스탈린의 죽음이라는 국가적 사건을 맞이한 인민들의 표정을 흥미롭게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치 전범의 재판이라는 역사적 청산의 순간을 맞이한 인민들의 표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더불어 단순 기록을 목적으로 촬영되었을 이 영화의 푸티지들이 종종 영화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순간, 이를테면 러시아어로 말하는 재판관과 독일어로 말하는 피고와 그 사이의 통역관 사이를 부드럽게 오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편집 등을 보고 있자면, '기록으로서의 영화'가 지닌 의미를 새삼 재고하게 된다.

<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베르너 헤어조크 2022

이 영화는 베르너 헤어조크가 2016년작 다큐멘터리 <인페르노 속으로>를 촬영하던 중 알게 된 화산학자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 부부는 70년대부터 세계 각지의 화산 활동을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한다. 순전히 과학적 호기심에서 시작한 이들의 기록이 점차 예술적 다큐멘터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베르너 헤어조크가 뒤쫓고 있다. 그는 크래프트 부부의 전기를 다룬 책과 영화는 수두룩하게 나와있기에, 자신은 그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을 만들겠다 말한다. 실제로 '진혹곡'으로 불리는 여러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헤어조크는 부부가 목숨을 잃은 1991년 일본 규수에서 분화한 운센 화산의 이미지를 영화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고, 부부의 영상이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그것이 어떻게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하는 데 영화의 전체를 할애한다. 영화 속 장면의 90% 이상은 부부가 직접 찍은, 혹은 그들이 출연한 영상들이다. 영화를 보며 그간 내가 보아온 화산의 이미지가 크래프트 부부의 화산 이미지였음을, 적어도 그들이 화산을 찍는 방식에 크게 빚지고 있는 영상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학구적인 이유로 화산을 찍다가 수많은 이들이 화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광경을 목격한 이후 화산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헤어조크는 설명한다. 하지만 그들이 포착한 화산의 이미지는 그저 매혹적이다. 심지어 부부 마저도 화산에 매혹되어 그것에 다가가려다 목숨을 잃었다. 무엇보다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숭고미를 연상시키는, 혹은 헤어조크의 내레이션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 이후에나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이미지의 향연은, 그것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것에 매혹되기 충분하다. 이 영화는 헤어조크가 크래프트 부부에게 바치는 뒤늦은 진혼곡이지만, 동시에 자신이 매혹된 이미지와 관객들을 결부시키고자 하는 헤어조크의 오랜 욕망이 여전히 발현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마리우폴리스 2> 만타스 크베다라비치우스 2022

감독인 만타스 크베다라비치우스는 2022년 3월 말 러시아 군에 의해 사망했다. 이 영화는 그가 전편에 담았던 마리우폴의 사람들을 다시 담고자, 전쟁의 최전선인 곳에 다시 찾아가는 상황을 담아낸다. 건물 바깥에선 폭음이 들려오는 상황에서 계단 위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여주며 시작한 이 영화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담아낸다. 집과 일터는 불타버렸고, 사람들은 갈 곳이 없다. 침례교 교회에 모여 살아가는 이들은 개와 비둘기를 돌보고, 함께 요리하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해오고, 마당의 파편들을 청소는 등의 일상을 꾸려나간다. 문틈 뒤에서 혹은 깨진 유리창 뒤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영화 초반의 감독은 남아있는 이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가 곳곳을 담아낸다.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도 않고, 어떤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러닝타임 내내 들려오는 폭음과 화면에서 느껴지는 진동만으로도 이들의 상황은 생생히 다가온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무서운 지점은, 만타스 크베다라비치우스 감독이 영화를 찍던 중 러시아 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감독 사후 그의 연인인 한나 빌로브로바가 완성했다.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이 감독의 죽음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품게 된다. 현지인 감독이 전쟁 상황을 담아낸 대부분의 영화는 그 영화가 완성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감독의 안전과 영화의 끝맺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러한 안정감을 가질 수 없다. 폭격이 언제든지 스크린에 담길 수 있다는 불안감을, 이 영화는 가장 밀착된 방식으로 전달한다. 감독이 영화의 완성까지 담당한 그의 또 다른 유작 <프롤로고스>는 오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우리의 심장박동은 폭발하는 별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제니퍼 레인스포드 2022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벌어진 대지진과 쓰나미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배우자를 잃은 사람, 트라우마로 인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의 인터뷰와 함께, 쓰나미로 인해 휩쓸려간 쓰레기들이 도착한 하와이의 해변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습, 재난으로 발생한 쓰레기 더미가 해양을 나도는 동안 그 안에 서식하게 된 생물들까지, 다양한 존재들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얽힌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문제는 그것의 얽힘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다. 스웨덴의 영화감독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제니퍼 레인스포드의 시선은 재난보단 재난을 통한 얽힘에 방점이 찍혀 있다. 때문에 재난을 겪은 이들의 슬픔라던가, 뇌과학적으로 증명되는 다양한 트라우마 등은 얽힘을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소재로 전락한다. 재난과 재난 이후에 대해 전지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이지만, 영화는 자신의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 속 모든 대상을 그저 대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 리티 판 2022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1984]를 기본 틀로, 멜리에스, 랑, 고다르, 마르케 등 다양한 영화의 푸티지, 핵실험을 비롯한 다양한 재난적 이미지, 폭력과 혁명의 이미지, 먹방 유튜버 등 소위 관심 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점토로 만들어진 동물들의 인형과 함께 등장한다. "동물이 인간을 지배한다면, 그리고 동물이 인간이 남긴 이미지들을 연구하게 된다면, 그들도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할끼?"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조지 오웰의 소설은 물론 <혹성탈출> 등 수많은 창작물이 말해왔던 모티프를 그대로 반복한다. 이 반복에는 이렇다 할 업데이트도, 반영도 찾아보기 어렵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는 통렬한 아포리즘이라기보단, 너무 많이 봐온 것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는 것에 그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우간다> 캐스린 추벡 2021

우간다 와카리가 마을엔 '라몬 필름 프로덕션'이 있다. 이곳은 마을의 이름을 따 '와칼리우드'라 불리는 영화 제작사다. 회사를 차린 I.G.G. 나브와나 감독은 영화 <누가 캡틴 알렉스를 죽였는가?>의 예고편을 유튜브에 올렸고, 이 영상을 본 미국인 알란 호프매니스는 그 길로 우간다행 비행기에 오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우간다>는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협업을 다룬다. 우간다 최초의 액션영화를 표방한 나브와나의 영화들은 국내에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이들의 영화제작은 모든 방면에서 독학, 수제작, 자주제작의 형태를 띤다. 헬리콥터나 소품용 총 등은 물론이거니와, 삼각대, 지미집, 편집용 컴퓨터 등 모든 것을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고, 배급은 가내수공업으로 구워낸 DVD를 통해 이루어진다. VJ(Video Joker)라는 독특한 형식, 70~80년대 할리우드 액션영화, 쿵푸영화, 서부극, 호러영화 등의 영향을 받은 액션 코미디라는 것은 와칼리우드의 영화가 어디서 기원했는지를 알려준다. 영화는 나브와나와 호프매니스의 협업이 시작된 과정부터, 그들의 영화가 전세계 영화제에 배급되기까지의 다사다난한 과정을 다뤄낸다. 개인적으로 2017년 <배드 블랙>을 들고 부천영화제를 찾은 호프매니스에게 들었던 와칼리우드의 영화제작 방식과 이야기들을 영상으로 재확인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는 2019년 토론토국제영화제 장르영화 섹션에서 나브와나의 영화 <미친 세상>이 상영되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삼는다. 2017년 부천에는 비자 문제로 오지 못했던 감독은, 우간다 내에서 TV드라마를 연출하는 등 유명세를 쌓아 외국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스스로 우간다의 영화산업을 일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영화를 통해 우간다 빈민가를 묶어내는 어떤 힘을 보고 있자면, '영화의 힘'이라는 한없이 진부한 말을 다시금 꺼내들 수밖에 없다. 

<발코니 무비> 파벨 로진스키 2021

2년 반의 시간 동안 1천여명의 행인을 발코니에서 촬영한 영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까지 촬영이 진행되었다. 감독은 행인들에게 "당신은 누구인가요?"부터 "삶이란 무엇일까요?"와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에게서 벗어난 여성, 킥보드를 타고 가다 넘어진 동생을 보러 달려가는 아이, 춤을 추거나 노래를 선보이는 사람들, 막 교도소에서 출소한 남성, 파트너와의 관계를 이웃들에게 숨기고 살아온 동성애자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감독의 발코니 앞을 지나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길을 자주 지나다니는 이웃들이 발코니의 카메라를 먼저 찾거나 반겨주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팬데믹과 락다운으로 인해 이 영화에 뒤늦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크게 의미있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기묘한 불편함을 안고 보았다. 한 행인은 "나는 고개를 꺾어 위를 바라보는데 당신은 편안해 보인다." 말한다. 발코니에서 행인들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카메라를 든 사람과 촬영되는 대상 사이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강화한다. 더군다나 카메라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며 행인들을 포착한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무인칭의 CCTV 시점도, 행인들을 굽이 살피는 전지적 시점도 아니게 된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가 처음으로 보도블럭을 벗어나 멀리서 걸어오는 행인을 포착한 장면의 대상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감독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기획은 충분히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 종종 프레임 안으로 모습을 비추는 붐마이크는 이 영화의 카메라가 감독의 시선을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상기시켜준다. 그러한 지점들은, 행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보여주는 반응들의 흥미로움과 별개로, <발코니 무비>라는 기획의 안일함을 보여준다.

<홈그라운드> 권아람 2022

1996년 개업한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는 그곳의 '섬지기' 윤김명우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2019년 이태원으로 이전한 이 곳은 코로나19 이후 경영난을 겪었다. <홈그라운드>는 윤김명우를 중심으로 70년대 명동의 '바지씨'와 '치마씨'들의 이야기부터 2000년대 신촌 공원의 십대 레즈비언들, 자신만의 공간을 일궈가는 2020년대의 퀴어들까지 다양한 공간과 경험을 담아낸다. 퀴어에게 "왜 그들만에 공간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홈그라운드>는 하나의 대답이 된다. 영상집단 움이나 연분홍치마의 여러 작품들이 한국 퀴어의 역사를 담아내왔던 것처럼, <퀴어의 방>으로 동시대 청년 퀴어들의 삶을 들여다 보았던 권아람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조금 더 넓은 역사를 담아내려 한다. 7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기나긴 시간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이 영화는 퀴어들의 안전한 공간을 일궈낸 이들의 생존기다. 공권력의 탄압과 사회적 압박을 피해 대전으로 내려간 '꼭지'의 이야기부터 퀴어들이 취미를 공유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댄스 스튜디오 '루땐'까지 많은 공간과 사람이 영화 속에 스쳐지나간다. 영화의 후반부는 변희수 전 하사의 죽음 이후 이태원에서 진행된 거리행진 장면을 담아낸다. 많은 이들이 스쳐지나갔고, 윤김명우를 비롯한 이들이 일궈냈으며, 함께 살진 않더라도 하나의 대안가족을 형성하게끔 하는 그 공간들은 결국 생존을 위한 공간이다. <홈그라운드>는 퀴어의 집이 될 수 있는 공간들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아낸다.

<부부> 프레데릭 와이즈먼 2022

이 영화는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첫 픽션 영화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와이즈먼의 픽션 영화라니, 그것도 소피아 톨스토이의 편지를 소재로 했다니. 와이즈먼의 영화 대부분은 하나의 집단, 조직, 공동체를 다룬다. 발레단, 시청, 미술관, 마을, 도서관, 동물원과 같은 곳이 그의 카메라에 담긴 공간들이었으며, 와이즈먼은 그 공간들이 각자의 치열한 경합을 통해 하나의 집단으로써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부부>는 그것을 한 쌍의 커플이라는, 극단적으로 작은 집단, 조직, 공동체로 축소한다. 영화는 소피아 톨스토이의 역을 맡은 배우가 톨스토이 부부가 주고 받은 편지의 인용문을 읽는 것과 다양한 자연을 병치시키며 진행된다. 이러한 구성은 와이즈먼의 이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 인서트로 건축물이나 자연을 보여주며 집단 내 사람들의 대화를 담아내는 것은 그의 영화가 언제나 고수하던 방식이다. 하지만 <부부>에는 대화의 상대가 없다. 이 영화엔 소피아 톨스토이는 등장하지만 레프 톨스토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종종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인용문 낭독 연기를 선보이는 가상의 소피아는 자신의 편지를 읽는(듣는) 대상을 관객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만 같다. 혹은 그의 편지가 남편에게 온전히 닿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의 원제는 "Un Couple(영어로는 A Couple)", 그러니까 보통명사 '커플'이다(그래서 <부부>보다는 <커플>이 조금 더 맞는 제목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영화의 제목은 '톨스토이 부부'를 호명하고 있지 않다. <내셔널 갤러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인디애나 몬로비아> 같은 제목과 <동물원>, <시티홀>, <주 의회> 같은 제목들을 떠올려보자면, 와이즈먼은 제목이 고유명사인 경우와 보통명사인 경우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부부>의 대상은 톨스토이 부부이지만, 영화가 결론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보통명사로서의 부부 혹은 커플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의 형태를 다시 돌아보자. <부부>는 소피아 톨스토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남편에게 쓴 편지를 읽는 모습을 담아내지만, 소피아의 말을 듣는 대상은 영화 속에 부재하고 심지어 스크린 바깥을 지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와이즈먼이 톨스토이 부부의 이야기를 모든 커플에게 작동하는 일반원리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부부' 혹은 '커플'이라는 극소공동체는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대한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는 있겠다. <동물원>의 마이애이 동물원이나 <시티홀>의 시카고 시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부부>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 '두 사람'이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재연된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부>는 비록 픽션으로 분류되고 있다 쳐도, 와이즈먼의 필모그래피가 지닌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 어떻게 보면 1930년생 감독인 와이즈먼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최후의 대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라는 인상마저 주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OO은 장르화 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