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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23. 2017

나도 타티의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고 싶다

자크 타티의 걸작 <플레이타임>

 1만 5천 평 부지에 아예 도시를 지어버리고, 그곳에 표류한 인물을 70mm 필름으로 담아낸 자크 타티의 걸작 <플레이타임>을 서울아트시네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스크린에서 만났다. 상영 후 이어진 토크 내내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자랑하던 70mm로 관람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좁은 노트북 화면이 아닌 널찍한 스크린을 통해 <플레이타임>을 감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공항부터 회사와 연립주택, 레스토랑과 로터리까지 만들어낸 ‘타티빌’은 스크린이 아니면 온전히 경험할 수 없는 공간이다. 관객은 타티가 직접 연기하는 코미디 캐릭터 윌로(타티의 전작 <윌로 씨의 휴가>, <나의 아저씨>에도 등장했음)를 따라 타티빌 속을 흘러 다닌다. 보통의 영화라면 인물의 동선에 따라 영화 속 공간이 파악되어야 하는데 <플레이타임> 속 공간들은 그렇지 않다. 통유리로 된 벽, 회색 질감의 기둥, 어디가 누구의 자리인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이 생긴 파티션으로 나뉜 사무실 등의 공간은 그곳이 그곳으로 보이도록 구성되어있다. 윌로가 미로 같은 사무실의 어느 곳을 가도 안내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혼란한 공간이다. 후반부에 무려 50분의 러닝타임을 차지하는 레스토랑 ‘로얄 가든’ 장면은 같은 공간을 다양한 방향에서 촬영하고, 인물들의 동선을 극도의 카오스로 설계하여 혼란을 준다. <플레이타임>은 타티빌처럼 잘 설계된 무질서가 스크린을 수놓는 영화다.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어 제작한 타티빌은 파리의 어딘가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상 무국적의 공간에 가깝다. 그곳이 파리라는 증거는 이따금씩 유리창에 비치는 에펠탑과 개선문 밖에 없다. 대부분이 통유리로 된 고도로 정형화된 건축물에서 지역성은 배제되어 있다. 심지어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도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가령, 오프닝의 공항 장면은 한 무리의 관광객이 버스를 타러 나가면서 간판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곳이 공항임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곳 이공항인지 상담소인지 병원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이어지는 회사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통유리로 이루어진 (실제로 5~6층의 건물을 올린) 회사 건물은 어느 순간 인테리어 박람회장으로 보이는 공간과 뒤섞여버린다. 두 곳은 같은 건물인가 옆에 있는 닮은 건물인가. 윌로는 미팅을 약속한 사람과 벌이는 묘한 술래잡기 끝에 그 사람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옆 건물의 통유리에 비친 상이었을 뿐이다. 그 장면부터 건물이 아닌 도시 속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는 윌로의 여정이 이어진다. 윌로는 한참을 헤맨 끝에 고급 레스토랑 ‘로얄 가든’한다. 영화 속에서 공간의 정체성이 가장 뚜렷한 공간이지만, 아직 공사가 덜 끝난 덕분에 점점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은 해체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는 서커스 풍의 음악과 차들이 빙빙 돌아가는 로터리의 이미지를 통해 타티빌 자체를 놀이동산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수많은 인파가 몰린 놀이동산 속에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고 상점들이 영업하는 것처럼 <플레이타임>의 무질서 속에서도 묘한 질서가 형성된다. 

 때문에 <플레이타임>은 자크 타티식 디스토피아 영화처럼 느껴진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플레이타임>의 타티빌은 극도로 설계된 공간이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어 설계된 타티빌 속 사람들은 거대한 개미굴 속 개미 같다. 게다가 모든 건물, 심지어 사람들의 주거공간인 연립주택마저 통유리로 되어 속이 훤히 보인다. 벤담의 판옵티콘 이론이 그대로 적용된 듯한 디자인, 마치 TV를 연상시키는 연립주택의 통유리 디자인은 누군가에 의도로 인해 정형화된 디자인의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곳을 감시와 관음의 공간으로 완성시킨다. 그곳을 찾은 외지인 윌로가 그곳에서 표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윌로와 한 무리의 관광객들에 의해 타티빌에 혼란이 찾아온다. 길을 잃은 윌로와 도시를 정신없게 만드는 관광객 무리는 질서 있게 설계된 타티빌에 무질서를 촉발시킨다. 무질서의 흐름은 입장하는데 신분의 제한이 있는 고급 레스토랑 로얄 가든까지 이어진다. 그곳의 유리문이 부서지면서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공사가 덜 끝난 식당, 완벽히 설계되려는 도시의 빈틈에서 벌어지는 무질서는 온갖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등에 왕관 모양이 찍힌 부자 계층부터 현란한 패턴의 옷을 입고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히피, 이방인인 윌로와 관광객까지 무질서한 조합 속에서 묘한 질서가 생기는 광경은 도시의 틀에 박힌 질서 정연함을 해체한다. 무질서한 질서가 지나간 파리의 모습을 놀이동산처럼 그리는 마지막은 그래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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