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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21. 2023

직설성의 함정

<슬픔의 삼각형> 루벤 외스틀룬드 2022

*스포일러 포함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무수한 영화들이 택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문제를 직설적으로 묘사하거나, 어떤 알레고리를 통해 은유하거나. <슬픔의 삼각형>은 직설 그 자체다. 패션모델 커플인 칼(해리스 딕킨슨)과 야야(살비 딘)의 이야기를 담은 1부, 이들을 포함한 부자들이 탑승한 선장 토마스(우디 해럴슨)의 호화 요트에서의 이야기가 2부, 그리고 해적에 의해 요트가 침몰하자 조난당한 생존자들이 머물게 된 섬의 이야기가 3부다. 세 개의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강조되는 것은 계급이다. 그것은 주목경제 속에서 젠더를 가로지르며 벌어지는 것이기도, 배의 가장 낮은 부분부터 햇살 가득한 갑판에 이르는 구조를 통해서도, 계급 관계가 전복되는 섬의 공동체에서도 드러난다.      

 문제는 이 영화의 직설성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직설적인 영화의 장면들은 계급의 문제를 관객의 눈과 귀에 직접 때려 박는다. 인플루언서가 뒤늦게 도착하자 패션쇼에 앉은 이들을 일으켜 한 칸씩 옆자리로 옮기게 해 결국 칼이 뒷자리로 가게 되는 트래킹 숏은 정말 단순한 방식으로 주목경제의 작동방식을 보여준다. 주목받지 못한 사람은 탈락하고 잊힌다. 승객 대부분이 구토를 일으키며 끝난 선장 만찬 장면에서 러시아 사업가 드미트리와 선장 토마스가 이런저런 문구들을 인용하며 벌이는 어떤 대결 장면, 그들 스스로 “러시아 자본주의자와 미국인 사회주의자가 초호화 요트에서 이러고 있다”라고 말하는 모습은 냉전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요트 청소부였던 애비게일(돌리 데 레온)이 생존능력으로 인해 자원 분배 권력을 얻는 3부는 계급의 역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계급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다룰 뿐이다. 만찬을 먹다가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고 역류한 오물을 뒤집어쓰는 부자들의 모습, 그 위로 들려오는 토마스와 드미트리의 대화를 보는 것은 아이러니가 스크린 위에 현시되는 것도 그것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폭로하는 것도 아니다. 관객이 보고 있는 승객들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그저 아이러니를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이를 지켜보는 것은 그다지 통쾌하지도, 즐겁지도, 웃기지도 않다.      

 3부는 그것을 만회할 기회였다. 생존능력은 없는 부자들과 달리, 물고기를 잡고 불을 피울 수 있기에 권력을 쥐게 되는 애비게일의 모습은 일종의 ‘가모장제’(자막은 모계 사회라 되어 있지만, 대사는 matriarchy였기에 가모장제가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이다)를 구성한다. 이는 흥미로운 계급 코미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밑바탕이다. 하지만 <슬픔의 삼각형>은 그것을 포기한다. 여러 계급 권력 구도들을 뒤집고 다양한 측면에 걸친 이야기를 다루지만, 특유의 직설적인 모습은 3부의 다소 판타지적인 상황을 즐기는 데 걸림돌이 된다. 더 나아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 섬의 반대편에 리조트가 있었음이 드러남과 동시에 애비게일이 야야를 죽이려 시도하는 장면에서는 결벽증적인 조급함이 느껴진다. 섬 바깥을 상상하며 자본 권력, 관심 권력을 되찾을 날을 꿈꾸는 백인들과 다르게, 그곳이 리조트임이 밝혀지자 박탈감을 느끼는 애비게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3부 내내 다뤄온 계급 역전의 풍자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갑자기 닥쳐온 현실의 습격이 아니라 계급이 뒤집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 채 영화의 마지막 숏 속 칼처럼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사이다 썰’을 퍼트리고 만족스러워하다가, 자신이 다뤄보려던 내용이 생각보다 방대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로그아웃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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