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영화감독이자 영상 설치작가인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의 개인전이 논현동 플랫폼-L에서 개최되었다. 4월 20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자크 타티 감독의 영화 <Playtime>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동명의 작품, <플레이타임>을 위한 사전작업인 기록영화 <Kapital>, 2007년에 제작한 5채널 필름 설치작품 <Western Union Series: Small Boat >의 싱글 채널 버전 <The Leopard>가 전시되었다.
1960년생인 아이작 줄리언은 뉴욕 할렘 르네상스를 다룬 1989년 작품 <Looking for Langston>을 통해 주목 받았고, 1991년 <Yuong Soul Rebels>로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상을 받았다. 2011년 장만옥 등이 출연한 <Ten Thousand Waves>를 통해 한 차례 국내에서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다. 그는 흑인이자 퀴어인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삼아왔다. 그의 작품은 필름 누아르, 독일 표현주의 영화, 기록영화, 펑크 음악 등 대중문화를 뿌리로 삼는다. 다양한 인종과 성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정치적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글로벌 환경 하에 자본과 노동 등 오늘의 현실이 회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기한다.
<Playtime>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1967년도 영화 <Playtime>은 파리로 추정되는 도시에 도착한 이방인의 뒤를 따라간다. 통유리로 된 회사 건물들과 연립주택, 로터리와 공항, 식당까지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은 세트에서 촬영한 영화는 인위적인 질서 속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만들어낸 무질서를 포착한다. 타티 본인이 직접 연기한 윌로라는 캐릭터는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인공적인 질서 사이를 배회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초현대적 도시는 이방인과 (부르주아 계급들이 타자화한) 타자들에 의해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속에서 인공적인 자본주의적 질서 이전의 모습을 발견하며 마무리한다.
타티의 영화에서 제목을 차용한 이번 전시의 핵심 작품은 7채널의 영상 설치 작업이다. 전시장에 들어간 관객은 공간 한 가운데에 놓인 가로로 길쭉한 비율의 중앙 스크린과 그를 둘러싼 6개의 스크린을 마주하게 된다. 런던, 두바이, 레이캬비크 등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로 담은 숏이 각각의 스크린에 영사되고, 여러 인물들의 인터뷰와 대화는 어떤 스크린에 영사되었다 다른 스크린으로 옮겨간다. 관객은 영상을 따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7개의 스크린을 번갈아 보게 된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모든 정보를 습득하려는 통상적인 ‘영화 관객’의 관람법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관객은 타티빌에 처음 당도한 윌로처럼 전시장 안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관객은 두리번거리기를 통해 자본주의가 쌓아 올린 도시를 보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유령을 본다. 할리우드 스타 제임스 프랭코, <화양연화>의 장만옥, <킹덤 어브 헤븐>의 잉그리드 에거튼 지그로손, <박쥐>의 메르세데스 카브럴이 해지펀드 매니저, 기자, 작가, 외국인 노동자로 출연해 관객의 시선 이동을 이끈다. 가령, 제임스 프랭코와 미술품 경매사 시몬 드 퓨리를 인터뷰하는 장만옥은 2008년 경제침체 이후의 미술 시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메르세데스 카브럴은 비인간적인 노동 착취에 대해 증언한다. 작가로 등장한 지그로손은 모기지론을 통해 모든 것을 잃은 자본주의의 피해자가 되어 레이캬비크를 떠도는 유령이 된다. 이들의 이야기가 7개의 스크린을 옮겨 다니며 펼쳐지고, 관객은 그들을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현실 속으로 순식간의 관객을 넣어버린다. 자크 타티가 타티빌을 건설해 윌로를 페르소나 삼아 그 곳을 배회했다면, 아이작 줄리언은 전시장을 자신의 타티빌, 줄리언빌로 만들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해체하여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가령 런던의 해지펀드 매니저가 해지펀드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거대한 컴퓨터 서버들이 들어선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타티의 영화 속 유명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으로, 타티의 영화 속에서는 사람이 일하던 부스가 줄리언의 작품에선 컴퓨터의 모습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리고 이내 컴퓨터들은 유령처럼 사라진다. 물질적으로 재현해낼 수 없지만, 그 흐름 자체는 존재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경제침체 이후에 오히려 성장한 미술시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드 퓨리의 모습을 데칼코마니처럼 보여 주여 그 양면성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비유는 레이캬비크 장면에서 더욱 직접적이다. 작가로 등장하는 지르그손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과 땅을 샀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아이슬란드의 땅과 집을 떠도는 유령처럼 그려진다. 그의 동반자(로 추정되는)인 여성은 소파에 앉아있다 사라지고 작가는 계속해서 집 주변을 떠돈다. 호러 장르적 기법이 동원된 이 장면은 일반 대중과 가장 밀접하고 손쉽게 접촉할 수 있는 자본의 모습인 은행에 희생된 피해자를 그려낸다. 어느 건물의 둥그런 창에 몸을 기대는 작가의 모습은 특히 상징적이다. 금화를 연상시키는 노란색에 라이플에 달린 스코프와 같은 모습의 창문은 작가가 떠돌던 집을 겨냥한다. 작가는 스스로 은행의 사냥감이 되기로 한 듯 창문의 원형 프레임 속으로 들어간다. 7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등장하는 원형의 창문은 이제 관객을 겨냥하고 있는듯하다.
7채널의 스크린은 한 공간을 여러 앵글과 시간대의 쇼트로 분절시키고,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해체한다. 아이작 줄리언이 만들어 놓은 공간 속에 들어온 관객은 두리번거리기를 통해 이를 목격하고 동참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초현실적이고 극도로 인위적인 질서를 해체하고 무질서 속에서 새롭고 자연스러운 질서를 찾아낸 타티의 묵시록을 21세기에 맞게 재해석해낸다.
<Kapital>
아이작 줄리언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이론적 리서치를 진행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과들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사전작업을 진행한다. <Kapital>은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dhk <Playtime>을 준비하며 있었던 대담을 담은 기록영화다. 줄리언의 평생의 멘토 스튜어트 홀(Stuart Hall)도 질문자로 참여한다. 2채널로 상영되는 <Kapital>은 발화자와 청중을 동시에 비춤으로써 관객이 대담에 참여하고 있도록 느끼게 하는 효과와 동시에, 자본의 비물질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대담과 동시에 자본의 흐름을 몸짓 혹은 액체의 흐름으로 시각화하려는 시도들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시도들이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주며 자본의 비물질성을 부각시킨다. 이어서 등장하는 여러 영화 속 증권거래소와 은행의 몽타주는 자본과 그 흐름에 대한 묘사는 피상적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Kapital>, 한국어로 <자본론>이라는 제목은 당연하게도 칼 마르크스의 저서에서 따온 이름이다. 대담에 질문자로 참여한 스튜어트 홀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젠더적으로, 인종적으로 재해석하여 확장시켜야 한다고 질문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번 개인전의 두 번째 순서인 <Kapital>은 <Playtime>을 설명하기 위한 각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지는 두 작품의 연계성은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The Leopard>
아이작 줄리언의 2007년작 5채널 필름 설치 작품 <Western Union Series: Small Boat>를 싱글 채널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가 1963년에 연출한 동명의 영화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실제로 비스콘티의 영화가 촬영된 바로크 풍의 궁전과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에 밀입국하려는 난민들의 여정을 그리는 작품으로, 실제 난민들이 다녀간 곳과 판타지적인 화면이 뒤섞여있다. 물에 빠진 난민의 모습을 위아래 분간이 없어 보이게 촬영한 화면, 그 몸짓을 바로크 풍 궁전의 바닥에서 이어가는 모습은 삶과 죽음, 난민의 현실을 이어준다. 실재하는 궁전의 모습이 표현주의 영화의 세트처럼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은 서구권에 어떤 실패에 대한 성찰이다.
아이작 줄리언의 이번 개인전은 동시대의 가장 사회참여적이고 정치적인 그의 작품을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특히 <Playtime> ~ <Kapital>로 이어지는 전시는 21세기 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확장과 재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시대 영상 설치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시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묘한 압도감을 선사하는 아이작 줄리언의 작품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