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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5. 2017

극장 의자에 몸을 묶고 싶은 어느 관객의 넋두리

서울아트시네마 '경험과 지각, 그리고 비판으로서의 영화' 강의를 듣고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수강한 서동진 선생님의 강의 중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현재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극도로 산만해졌고, 아예 멍해지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인용이다. 나를 비롯해 일주일 7일,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구성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충격을 쏟아내는 영화-이후 영화들과 넷플릭스/유투브/IPTV/짤방 등으로 파편화되어 재생산되는 영화적 대상/객체를 비롯해 뉴스, 광고, 업무, 대인관계 등의 모든 영화적 텍스트(지금은 사람의 안구가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값이 영화적 텍스트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라고 생각한다)는 그것을 수용하고 처리할 순서를 미처 정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밀려들어 오는 정보량의 쓰나미이다. 막대한 정보량을 처리할 여유를 주지 않는 환경은 극도의 산만함을 불러온다. 이러한 산만함 속에서 각종 채널을 오가고 영화/정보를 관객의 마음대로 멈추고 재편집하고 넘기며 관람하는 것이 지금의 관람양식이자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용방식이다. 어제 강의에서 인용된 페둘러의 이론은 이러한 영화-이후 영화 시대의, 포스트시네마를 맞이한 관객들의 관람양식을 능동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람양식/수용방식은 정말로 능동적인가? 영화가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 혹은 작품으로 남지 못하는 시대에서 개인 미디어의 다중채널을 자유자재로 오간다는 행위는 과연 능동적인가? 우리/관객은 극도의 산만함 속에서 안구와 고막에 쏟아지는 정보를 차근차근 처리하고 수용할 여유와 토대를 잃어버렸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정보는 불변하는 어떤 완성품이 아닌 끝없이 쪼개지고 재편집 되는 텍스트들이다.V.Burgin은 "포스터, 광고, 예고편이나 비디오 클립, (스틸 이미지 등과 함께하는)신문 평론, 제작 과정의 사진들, 프레임의 확대 이미지들, 기념품 등. 이러한 기억 속의 환유적 파편들(metonymic fragments)을 수집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영화들에 대해 친숙하게 느끼게 된다. 이 때의 영화-시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미지 스크랩을 통해 구성되는 이질적인 심리적 대상-는 기존의 '영화학'의 맥락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대상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쏟아지는 대부분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양식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정보를 처리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동시에 우리에게 몰려드는 정보값은 사회문화적 계급으로 구분되어 각 개인에게 전달된다. 빅데이터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검색엔진의 변화는 수용과 표현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계급적으로 정해진 정보를 제공(이라기 보단 폭탄처럼 투척)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취향과 친숙하다고 느끼는 영화에 관객이 몰리고, 이것이 영화가 지닌 서사와 상관없이 관객을 동원하게 되는 어떤 충격의 모습이 아닐까? 동시에 이러한 충격 사이에서 빅데이터가 제공하는 계급적으로 정해진 영화/정보를 관람하는 것을 단지 채널을 오가고 영화를 멈추거나 장면을 건너뛸 수 있기에 능동적인 관람양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계급적으로 나뉘어 제공되는 영화 사이에서만 오갈 수 있는 능동은 극도로 수동적인 관람행태가 아닌가. 페둘러는 다크큐브 속 좌석에 몸을 속박하고 영화의 서사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관람양식을 수동성이라, 백주대낮에 어디에서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것을 능동성이라 분류한다.  영화를 한 편의 완결된 작품으로써 다루는 시기는 지났다고 하지만, 관객의 극소수를 차지하는 씨네필들은 여전히 멀티플렉스와 시네마테크를 오가며 극장이라는 다크큐브 안에 머물기를 자처한다. 극도의 산만함이라는 상태를 탈주하고, 안구와 고막에 쏟아지는 정보량을 스크린에 영사되는 빛과 극장 의 6채널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로 제한하는 관람양식은 다크큐브를 벗어난 관람양식에 비해 과연 수동적일까. 계급적으로 선별되어 만들어진 취향에 따라 주어지는 영화를 '능동적'으로 관람하는 대신, 극장이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상영하는 포스트시네마 이전의 작품 혹은 '미묘한 충격'만을 전달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다크큐브 속에 몸을 속박하는 관람양식은 극도의 수동성을 보일지라도 더욱 능동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영화를 극장 안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보일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틀은 붕괴된지 오래다. 그보다는 극도의 산만함, 멍한 상태를 벗어나 극장 의자에 몸을 묶고 싶은 어느 관객의 넋두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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