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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Dec 15. 2017

광장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

장준환 감독 <1987>

 장준환 감독은 계속해서 386세대의 감성, 부채의식, 폭력성 등을 영화에 담아왔다. 데뷔작인 <지구를 지켜라!>와 10년 만에 내놓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폐쇄된 공간을 통해 그의 중요한 테마들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이제 직접적으로 80년대의 한국을 담아낸다. <1987>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의 죽음까지를 다룬 작품이다.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 그의 밑에서 일하던 조한경 반장(박희순), 박종철의 부검을 지시한 최환 검사(하정우),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이희준)와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김의성), 영등포 교도소의 간수인 한병용 교도관(유해진)과 안유(최광일), 장세동 안기부장(문성근), 강민창 치안본부장(우현), 김정남(설경구), 김승훈 신부(정인기) 등의 실존인물들이 본명으로 등장한다. (한병용 만이 실존했던 두 인물의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만들어낸 캐릭터이다) 그만큼 <1987>은 6월 항쟁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고 꼼꼼한 고증을 통해 그려낸다. 동시에 연희(김태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외부에 있던 개인이 어떻게 6월 항쟁에 동참하게 되는지를 다룬다. 여진구와 강동원이 각각 박종철과 이한열로 특별출연했다. 그간 한국의 상업영화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주조연급 배우들이 모인 작품이기도 하다.

 <1987>은 한 개인에게 집중하여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사건을 중심에 놓고 이를 따라가는 각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가 개인의 시선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관찰하듯이 따라가는 작품이었다면, <1987>은 드라마 <제5 공화국>처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마치 옴니버스처럼 각 인물들의 면면을 관찰하는 식이다. 비슷한 영화를 찾아보자면용산참사 이후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 <소수의견>이 떠오른다. 인물 대신 사건을 중심에 놓고, 악인과 정의로운 누군가, 그 경계 혹은 외부의 인물이 사건을 통해 각성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1987>이 선택한 방식이다. 이러한 선택이 <1987> 안에서 원활하게 작동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는 분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중심 사건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은 촘촘하게 129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채운다. 문제는 각 인물들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할 여지를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남겨둔다는 것이다. 가령 한병용이 등장할 땐 한병용의 상황에, 연희가 등장할 땐 연희에게, 윤상삼 기자의 이야기에선 그에게 각각 몰입하게 된다. 박처원이나 조한경 반장이 등장할 때면 그들을 향한 분노에 파묻힌다. 때문에 핸드헬드 촬영과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들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도리어 영화를 산만하게 한다. <1987>이 <택시운전사>처럼 한 인물의 이야기에 집요하게 집중했다면 모를까, <도둑들>이나 <암살>과 같은 앙상블 연기가 아닌 이상 이러한 연출은 패착에 가깝다. 영화는 어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인물들을 관찰하고, <레미제라블>과 같은 뮤지컬 시퀀스처럼 연출되는 마지막 집회 장면의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을 끓어오르게 해야 했다. 

 아무래도 같은 해에 나온 영화이기에 <택시운전사>와 <1987>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처럼 느껴진다. 80년 5월의 광주와 87년의 서울, 그리고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촛불혁명을 지켜보고 기억하고 배운 사람들에게 두 편의 영화는 같은 사건과 시기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다른 감정을 가지게 한다. 어찌 보면 두 영화와 관객들은 서로 다른 광장을 유사한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앞서 말한 시선의 차이일 것이다. 관객들은 이미 촛불의 광장을 경험했다. 두 영화에 담긴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의 광장 일지는 몰라도, 시민들이 시청 앞 혹은 광화문을 가득 매운 사진을 봤을 때의 감정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택시운전사>는 체험보단 관찰의 시선으로 광장을 담는다. 외지인과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이러한 관찰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설정이다. 아쉽게도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러한 태도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1987> 역시 관찰의 태도를 보인다. 동시에 연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관찰을 넘어 참여를 유도한다. 아쉬운 점은 앞서 언급한 산만함이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선은 인물들에 대한 관객의 감정적 동의를 성급하게 이끌어낸다. 분명 클라이맥스가 존재하는 영화이지만, 각 캐릭터의 클라이맥스가 러닝타임 중간중간 등장하기도 하고,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과 각 배우의 존재감에 캐릭터 간 비중이 무너지기도 한다. 한 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 다른 인물은 영화 속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결국 <1987>은 관찰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실패한다. 대신 영화는 연희로 대표되는 해당 시대정신에 무지한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계몽시키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6월 항쟁과 촛불혁명을 상기시키는데 그친다. 더군다나 각성하게 되는 인물이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캐릭터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성인 연희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계몽적인 태도가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영화가 연희를 다루는 태도는 촛불정국에서 광장으로 나선 여성과 청소년들이 들었던 언어들을 상기시킨다. “여자/청소년이 이런 곳까지 나오다니 기특하다, 장하다” “너희들까지 이런 곳으로 나오게 만들어 미안하다” “이러한 시국에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 러닝타임이 흘러갈수록 변해가는 영화의 태도는 영화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여성과 학생들을 주체의 위치에서 배제시킨다. 어쩌면 누군가는 연희가 어느 남성의 도움을 받아 버스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치켜드는 장면을 보고, 386세대가 없었다면 연희와 같은 사람들이 각성할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386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손을 뻗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각자의 감상이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감상들은 결국 386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지닌 계몽적, 혹은 시혜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결국 장준환 감독 또한 그 세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선 두 작품이 386세대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날이 선 태도로 드러내고 일정 부분 비판하는 영화였다면, <1987>의 언어는 위와 앞서 언급한 광장 속에서 여성/청소년들이 들었던 것과 크게 결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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