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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15. 2018

그래 미국은 망했어

<화씨 11/9: 트럼프의 시대> 마이클 무어 2018

 마이클 무어는 2004년 <화씨 9/11>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14년 뒤 제목의 숫자를 뒤집은 <화씨 11/9>를 내놓는다.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Fahrenheit 9/11’(화씨 9/11)의 숫자가 11/9로 바뀌는 것으로 시작한다. 9/11 테러와 존재하지 않는 대량학살무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벌인 부시 정권이 21세기 미국의 첫 분기점이었다면, 2016년 11월 9일 트럼프의 당선은 그 두 번째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될 것이라 믿는 힐러리의 지지자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 투표 당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은 개표가 진행될수록 어두워진다. 마이클 무어는 11월 9일 새벽 당선되어 당선 연설을 하는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을 보며 “가장 우울한 당선인의 얼굴”이라 표현한다. 트럼프의 시대는 그의 우울한 얼굴과 함께 시작한다.

 <화씨 11/9>는 트럼프의 2018년 현재를 논하는 대신, 대선 앞뒤의 기간에서 현재진행형의 폭풍으로 존재하는 트럼프가 어떻게 당선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오간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마이클 무어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영화 속에서도 짧게 스쳐 지나간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6,600만 표를 받은 힐러리가 6,300만 표를 받은 트럼프 대신 낙선했다는 이야기가 아닌, 투표를 하지 않는 1억 명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며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영화의 절반 가량 트럼프의 얼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그의 당선으로 이어지는 징후였음을 보여주는 우회적인 방식을 취한다. 영화가 처음 주목하는 곳은 미시간 주의 플린트 시이다. 미시간 주지사인 공화당의 리처드 스나이더는 플린트의 수도사업을 민영화하고, 수원지를 휴런 호에서 플린트 강으로 바꾼다. 공업지대인 플린트 시의 폐수로 인해 오염된 플린트 강물은 파이프를 부식시켰고, 여기서 납이 물에 녹아들며 주민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나이더를 비롯한 미시건 주 당국은 물이 정상기준에 부합한다며 수원지를 변경하지 않았고,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나서기 전까지 수도 오염이 지속되며 플린트 시의 거의 모든 아이들에 납에 중독되고 만다. 마이클 무어는 플린트 시의 인구 중 2%만이 백인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상황을 ‘느린 속도의 인종청소’라고 부른다. 자본과 권력의 결탁에 의한 도시 전체의 게토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해결하겠다고 플린트 시를 찾은 오바마가 그곳에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는 쇼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플린트 시의 흑인들은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투표를 거부하고야 만다. 

 이와 유사한 양상은 미국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종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교사의 처우와 봉급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교육제도로 인해 촉발된 웨스트버지니아의 교사 파업, 스톤월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촉발된 청소년들의 총기제도 반대 운동, 여성, 이슬람계, 비백인 인종을 중심으로 한 하원의원 선거 출마와 대도시 이외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등이 촉발된 과정들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와 보수화된 민주당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온건한 사람을 선거 당선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한다. 결국 민주당이 국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공화당의 인물들이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고, 이는 1억 명의 무투표자와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트럼프는 보수화된 민주당 기득권이 자초한 상황 속에 등장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명확하게 잡아챈 사람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자신과 지지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갔고, 결국 당선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사 파업, 청소년들의 총기제도 반대 운동, 소수자 계층의 하원의원 출마, 풀뿌리 민주주의 회복 운동 등은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교사 파업은 교사뿐만 아니라 스쿨버스 운전수와 급식 조리사 등 학교 내 전 직원의 임금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고, 청소년들의 행진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소수자 계층 인물들의 하원의원 출마는 (영화에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영화에 출연한 몇몇 후보들이 이번 간선거에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트럼프 시대에 대한 반발은 민주당이 아닌, 정치 밖의 사람들(교사), 선거권 밖의 사람들(청소년), 기득권 밖의 사람들(여성, 비백인)에 의해 가시화되고 진행된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는 미국은 아직 존재한 적 없는 미국, 즉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이며, <화씨 11/9>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희망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희망은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는 것일 뿐이라는 비관을 내비치기도 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마이클 무어가 언제나 그랬듯) 다양한 뉴스 화면과 공격적인 인터뷰, 적절히 사용된 다른 영화의 클립들을 사용해 보여주며, 더 나아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라이브 영상까지 활용한다. 이러한 방식의 정점은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 과정과 트럼프의 집권 과정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이클 무어는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 <의지의 승리> 속 히틀러의 연설 장면에 트럼프가 했던 말을 얹는다. 패턴화 된 역사 속에서 트럼프와 히틀러의 집권과정이 갖는 유사성을 설명하는 이 장면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자극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마이클 무어의 한계(자극성)와 강점(정보를 전달하기 가장 좋은 방식으로 수집하고 편집하는 것)이 한 번에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전작 <다음 침공은 어디?>가 소소한 성격이 강한 소품의 느낌이었다면, <화씨 11/9>는 9/11만큼의 위기를 겪고 있는 21세기의 미국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사건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려내려는 야심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동시에 이번 영화는 미국이 다시 한번 위기를 넘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비관적으로 내뱉는다. <화씨 11/9>는 총기제도 반대 운동을 주도한 청소년 활동가이자 총기난사 사건의 생존자 에마 곤잘레스의 연설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에마는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그들은 다시는 OO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는(never)이라는 말을 반복하다 말을 멈추고 눈물을 머금는 에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영화가 끝난다. 에마의 말은 총기난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트럼프 시대를 통해 망해가는 미국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비관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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