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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07. 2019

공동체는 유기체다

<인디애나 몬로비아> 프레더릭 와이즈먼 2018

공동체는 유기체다. 이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다큐멘터리 작품 대부분에 해당하는 명제일 것이다. 그는 <라 당스>의 파리 국립오페라 발레단, <내셔널 갤러리>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뉴욕 라이브러리라는 특수한 공동체의 모습을 관찰했다. 또한 <잭슨 하이츠에서>는 뉴욕 퀸즈의 잭슨 하이츠라는, 시민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촬영하였다. 그의 신작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그의 전작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미국 중서부 인디애나주의 한 소도시인 몬로비아 사람들의 일상을 찍는다. 여전히 그의 영화에는 내레이션과 인터뷰는 없고, 대신 몬로비아 주민들의 일상을 차근차근 관찰해 나갈 뿐이다.

 몬로비아는 백인 기독교가 중심이 되며, 목축업과 농업이 주된 수입원인 도시이다. 카메라에 거의 잡히지 않는 20~30대 청년들은 모두 다른 도시로 떠났고, 나이가 들어 고향에 돌아온 이들이나 고향을 떠나지 않고 이 곳에서 나이 든 이들만이 몬로비아를 지키고 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이 곳을 마치 구글 스트리트 맵을 통해 둘러보는 것처럼 촬영했다. 어느 농장, 주민회의가 벌어지는 공간, 학교, 체육관, 교회 등의 몇몇 공간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식당, 카페, 바, 타투샵 등이 영화에 등장한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인서트 쇼트들은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클릭을 통해 앞의 도로로 넘어가는 것처럼 편집되었다. 그러다가 흥미가 생기는 공간이 보이면, 그곳의 간판을 확인하고, 카메라가 공간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을 관찰한다. 그리고 다시 공간의 간판이나 전경을 보여주며 카메라가 빠져나오고, 다시 같은 방식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몬로비아 주민들의 동일하지 않은 경험, 일상, 직업 등을 하나의 큰 그물로 엮어낸다. 카메라를 통해 관찰된 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은 (아마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몬로비아의 역사, 주민들의 가치관 등을 알게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개별자이면서, 몬로비아의 주민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작동시킨다. 동일할 수 없는 이들의 집합은 제각각의 신체기관들이 ‘몸’이라는 큰 유기체를 구성하는 것처럼 몬로비아라는 커다란 유기체를 가능케 한다. 

 그렇다고 <인디애나 몬로비아>가 공동체의 아름다움, 혹은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순 없다. 영화의 배경은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의 중서부 미국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은 백인 기독교 중심의 이 도시를 조용히 관찰하기만 한다. 그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비하하거나, 부정적으로 그려내거나, 혹은 반대로 긍정하지도 않는다. 와이즈먼은 기계적 중립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이들을 관찰해내기만 한다. 동시에 하수처리장의 오물, 우리에서 이송되어 나오는 돼지 떼 등을 클로즈업하여 촬영한다. 이 장면들은 몬로비아가 지닌 일상의 세부적인 모습임과 동시에, 트럼프 당선 이후의 중서부 미국이라는 공간성에서 떼어 낼 수 없다. 이 장면들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 가로로 길게 펴지는 농약 뿌리는 농기계의 모습, 마지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구호와 함께할 것만 같은 장면과 대비된다. 결국 와이즈먼은 중서부 미국의 소도시라는 공간을 대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회유적으로, 그리고 분산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인디애나 몬로비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누군가의 출생, 탄생은 담기지 않는다. 와이즈먼은 이렇게 공동체의 생명이 끝나가는 시기를 포착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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