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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4. 2020

9. <노동의 싱글 숏>

원제: Labour in a Single Shot
감독: 하룬 파로키, 안체 에만
제작연도: 2011~2017


 하룬 파로키와 안체 에만이 함께 작업한 <노동의 싱글 숏>은 전시 [하룬 파로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7 전시실에 전시되었다. 총 16개의 스크린을 사용하였으며, 7 전시실 전체에 수직과 수평으로 놓인 작은 크기의 스크린에 세계 17개의 도시에서 촬영된 1~2분 길이의 싱글 숏 영상이 상영되었다. 각각의 싱글 숏들은 각 도시에서 노동하는 이들을 컷을 허용하지 않고 촬영한 영상들이다. 파로키와 에만이 진행한 비디오 워크숍을 통해 제작된 92편의 싱글 숏 영상들이 상영되었고, 건설 노동자, 구두 수선공, 요리사, 웨이터, 창문 닦이, 환경 미화원, 문신 예술가, 음악대학 학생 등이 싱글 숏에 담겼다. 이 싱글 숏들은 최초의 영화인 뤼미에르 형제의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1985)의 방식을 따른다. 파로키와 에만은 하나의 연속된 숏으로 완성된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 영화들이 움직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세히 보고 카메라에 담을만큼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노동의 싱글 숏>을 분석하기에 앞서, 같은 전시에서 함께 설치된 하룬 파로키의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 in Eleven Decades, 2006)을 먼저 논의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뤼미에르 형제의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처럼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 속 장면들을 가져온다. 파로키는 공장의 문을 나서자마자 개인으로 흩어지는 노동자들에 주목하며, 18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문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12편의 영화를 선정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부터, 작가와 제목 미상의 모스크바에서 촬영된 영화, <하노이의 메프르와 부르고앙 벽돌공장을 나서는 사람들>(가브리엘 베이르, 1899), <인톨러런스>(D.W. 그리피스, 1916), <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1926), <모던 타임즈>(찰리 채플린, 1936), <여성의 운명>(줄라탄 두도우, 1952), <붉은 사막>(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64), <원더공장에서의 조업 재개>(자크 빌르몽, 1968), <너무 이른, 너무 늦은>(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 1981), <Durchfahrtssperre>(엘코스타, 1987), 그리고 <어둠 속의 댄서>(라스 폰 트리에, 2000)가 그것이다. 12편의 영화 속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장면들은 <노동의 싱글 숏>이 전시되는 7 전시실과 이어진 미디어랩에서 가지런히 나열된 12개의 CRT 모니터를 통해 상영되었다. 각 모니터 당 한편의 작품 속 장면이 상영되었으며, 영화는 제작연도 순으로 배치되었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1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장의 문을 나서는 노동자의 이미지가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전시 팜플렛에 쓰여 있는 파로키의 글은, 노동구조가 노동자들을 동기화하고 하나의 무리로 만들며 이러한 압축의 과정이 만들어낸 노동력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산업 영화, 프로파간다 영화들 속 노동력이라는 이미지에는 ‘피착취자들’, ‘산업 프롤레타리아들’, ‘대중’과 같은 의미가 부여된다. 노동자 또는 노동력이라는 하나의 무리로 이미지화된 노동자들은 공장 문을 나서자마자 개인으로 흩어진다. 12편의 영화에서 공장의 문을 나선 노동자들은 어딘가로 향하거나, 그저 걷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짜여진 안무처럼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공권력에 의해 탄압당한다. 파로키는 자신의 글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화사 최초의 카메라는 공장을 향했지만, 백 년이 지난 지금 영화는 공장에 끌리기는커녕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 노동 혹은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는 주된 영화 장르의 하나로 부상하지 않았고, 공장 앞의 공간은 변두리에 남아 있다.” 결국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영화사에서 부각되지 못한 노동이라는 테마로 영화사를 다시 작성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파로키는 직접 선정한 12편의 장면들을 통해 극영화에서 다시 싱글 숏으로 돌아가려 한다. 동시에 12개의 CRT 모니터를 일렬로 배치하는 것은 멀티스크린을 통해 영화관에 있던 영화를 성좌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유사한 구성의 영화들을 사용한 파로키의 단채널 작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 1995)를 떠올려 보면, 단일 스크린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몽타주되던 장면들이 멀티스크린 영상설치 작품에선 공간적으로 몽타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객은 일렬로 배치된 멀티스크린 앞을 보행하며 파로키가 재구성한 영화사를 목격한다. 파로키가 재배치한 영화사의 타임라인 앞을 걷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노동의 싱글 숏>은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의 싱글 숏>의 ‘싱글 숏’들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 논리를 따라 촬영되었다. 파로키와 에만은 전세계 17개의 도시에서 1~2분 길이의 싱글 숏 비디오를 제작하는 워크숍을 진행했고, 패닝이나 트래블링 등의 카메라 움직임은 허용했으나 컷은 허용하지 않았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제목처럼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이미지를 영화사 안에서 수집하는 과정이었다면, <노동의 싱글 숏>은 최초의 영화 제작 방식을 2010년대에 다시 사용하여 노동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7 전시실에 16개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각 스크린당 대여섯편의 싱글 숏이 7분에서 11분 정도의 러닝타임을 갖고 루핑하는 방식으로 상영이 진행된다. 전시관을 가득 채운 스크린 모두를 한 눈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이 싱글 숏들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16개의 스크린 사이를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관객들이 선형적으로 다시 쓰인 영화사를 관람하는 것이었다면, <노동의 싱글 숏>의 관객들은 동시대의 다양한 공간 속 노동 사이를 거닐며 이를 인지하는 동시에 모든 스크린을 한눈에 볼 수 없기에 발생하는 비가시성을 동시에 느낀다.

 <노동의 싱글 숏>은 16개의 스크린을 직육면체 공간의 전시실 벽에 수평과 수직으로 놓이게끔 배치한다. 때문에 스크린과 스크린 사이의 공간이 강조된다 전시 팜플렛에 있는 전시맵을 보면, <노동의 싱글 숏>의 스크린들 사이 공간이 강조될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멀티스크린 설치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나 영화의 사각 프레임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프레임의 속성을 지닌다. 특히 영화와 연관하여, 영화에서는 프레임 내부의 차원과 프레임 외부의 차원의 구분이 명확하다면, 멀티스크린에서는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복수의 스크린으로 인해 흐려진다. 물론 멀티스크린의 프레임 내부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스크린 위에 상영되고 있는 것이 프레임 내부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반면 프레임 외부는 명확하지 않다. 멀티스크린의 프레임 외부 차원을 결정하는 것은 스크린이나 모니터의 물질적 형태, 크기, 공간적 배치, 스크린의 수, 스크린과 모니터들의 기술적 작용, 스크린 또는 모니터들이 전시공간의 건축적 구성과 맺는 관계다. 즉, 이러한 작품에서 물질적, 기술적 구성요소들은 이미지의 프레임 외부 차원을 구성하면서 프레임 내부의 영화적 구성요소들을 공간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파로키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몽타주를 공간화한다. 단일 프레임의 몽타주는 시간적으로 인접하는 두 이미지의 연합만을 허용한다면, 멀티스크린은 영화적 몽타주의 순차성을 벗어나 “동시적이고 다차원적인 사유의 양식을 성취”할 수 있다. <노동의 싱글 숏>, 그리고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은 얼핏 영화적 몽타주를 요하지 않는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는 듯하지만, 파로키는 멀티스크린을 통해 이미지들을 펼쳐 놓으며 공간적 몽타주를 시도한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영화사를 다시 쓴다면, <노동의 싱글 숏>은 전시실에 퍼져 있는 스크린들을 통해 노동의 모습들을 동시적으로 펼쳐 놓는다. 단일 프레임에 싱글 숏들을 퇴적시키는 몽타주 대신 멀티스크린에 싱글 숏들을 펼쳐 놓는 공간적 몽타주는 노동이 벌어지는 다양한 시공간 자체를 전시공간으로 옮겨온다. 스크린과 스크린 사이의 공간은 관객이 스크린을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공간이자 다른 스크린에 상영되는 ‘노동의 싱글 숏’들을 볼 수 없게 함으로써 노동의 비가시성을 드러낸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일직선으로 모니터를 배치하여 영화사의 선형성을 드러내는 방식의 공간적 몽타주를 시도했다면, <노동의 싱글 숏>의 복잡한 스크린 배치는 선형성을 파괴하는 방식의 공간적 몽타주를 시도한다. 또한 스크린 사이의 빈 공간들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을 보여줌과 동시에 볼 수 없게 한다. 스크린 앞에 서야만 제대로 들리는 사운드도 이러한 ‘보여줌과 동시에 보여주지 않음’의 효과를 강조한다. 때문에 관객은 싱글 숏들을 보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관객의 움직임은 싱글 숏들을 성좌적으로 잇는다.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 파로키라는 작가 개인이 그려 놓은 성좌 앞을 관객이 쫓아가도록 하는 작품이라면, <노동의 싱글 숏>은 관객이 스스로 성좌를 그리게 유도하여 노동에 대한 사유를 촉발시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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