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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27. 2020

30. <천일야화>

원제: As Mil e Uma Noites
감독: 미겔 고미쉬
출연: 크리스타 알파이아테, 조앙 페드로 베나르드
제작연도: 2015

 영화는 천일야화를 원작으로 하지만 이야기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형식만을 가져왔고, 2013~2014년 금융위기와 긴축재정으로 민초들이 빈곤해진 포르투갈의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밝히면서 시작한다. 영화는 3부작 안에서도 여러 개의 이야기들이 책의 목차처럼 병렬구조로 등장하는 형식이다.

 영화의 첫 화면은 조선소의 실직자들을 비춘다. 14살 때 조선소에 취직하면서 거대한 기계에 압도되었던 경험을 말하는 내레이션과 거대한 기계 앞에서 힘 빠진 모습으로 서 있는 실업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내레이션은 말벌 때문에 일을 잃은 양봉업자의 이야기와 뒤섞인다. 화면은 조선소에서 영화 촬영을 준비하는 감독의 모습으로 넘어간다. 내레이션은 감독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들이었고, 포르투갈의 현재를 담은 인터뷰들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감독은 결국 현장에서 도망친다. 스텝들에게 붙잡힌 감독은 땅속에 파묻혔다가, 세헤라자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미겔 고미쉬 본인이 직접 도망치는 감독으로 등장했다 세헤라자데의 아버지로 다시 등장하는 <천일야화>의 첫 이야기에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포르투갈의 현실을 직시하고자 하는 감독의 마음이 드러난다.

 원작이 되는 『천일야화』에서 세헤라자드가 처형을 하루씩 늦추기 위해 계속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영화 <천일야화>에서는 빈곤해진 민초들의 삶을 드러내고 현실을 조금씩 더 연장해 미래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성욕이 감퇴되고 판단력을 잃은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풍자극, 바다에 떠밀려온 밍크고래로 대변되는 실업자들이 남은 364일을 보내기를 기원하며 1월 1일에 수영대회를 벌이는 이야기, 생계를 잇기 위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법의 고리가 재판장에서 드러나는 이야기, 돈 없는 아파트 주민들 덕분에 계속해서 주인이 바뀌는 강아지 딕시의 이야기 등이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와 연극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야기들은 포르투갈의 현재를 직시하게 만든다.

 특히나 인상적인 이야기는 2부의 중간에 등장하는 ‘판관의 눈물’이다. 생계를 위해 빌린 가구를 팔아버린 모자의 사연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이들 식비를 위해 소를 훔친 사람의 이야기, 악덕 은행주의 꾀임에 넘어간 사람의 이야기 등으로 이어진다. 생계를 위한 불법은 끝없는 고리를 만들어내고 결국 하나의 사슬로 이어진다. 이성에 의해서만 판결하겠다는 판관은 어느새 고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린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애인에게 생일케이크를 만들어주려는 딸에게 조언을 해주던 따뜻한 판관의 얼굴에서 희망이 점차 사라져간다. 재판이 다 끝난 후 어두운 새벽녘에 일어나 케이크를 만드는 딸의 모습이 비춰지며 끝나는 이야기는 청년들 위에 드리운 어둠이 걷힐 수 있을지 질문한다. 아피찻퐁 위세라타쿤의 영화들을 촬영한 사욤브 묵딥롬이 맡은 촬영 덕에 연극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들의 사연이 이어진다. 문제는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사연이 현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딕시의 주인들’ 이야기도 인상 깊다.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똘똘하지만 기억력이 짧은 강아지 딕시는 여러 주인을 거친다. 지저분하게 긴 털을 가진 딕시가 한 주인 옆에서 끝까지 지내지 못한 이유는 주인들이 딕시를 두고 떠날 수 밖에 없거나 죽었기 때문이다. 돈은 그들을 아파트에서 쫓아내고, 병이 찾아 들게 만들고, 삶 밖으로 그들을 내몬다. 이야기 중간에 나오는 아파트 주민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빈곤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안정적인 삶 밖으로 쫓겨난 주인들 사이에서 딕시가 유령처럼 아파트를 떠도는 또 다른 딕시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천일야화>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으면서도 그 속에서 살고 있고, 현재가 망해 없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직시하려는 미겔 고미쉬 감독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미겔 고미쉬가 2013~2014년 금융위기 속의 포르투갈 민초들을 관찰한 보고서다. 끊임없이 들어가는 내레이션과 인터뷰들은 이야기들과 현실의 경계를 지워간다. 감독은 그 과정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관객들 또한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눈을 감거나 극장을 벗어나지 않는 한 <천일야화>의 관객들을 미겔 고미쉬가 그려낸 포르투갈을 볼 수 밖에 없다. <천일야화>가 381분, 6시간 21분이란 긴 러닝타임으로 완성된 것은 관객을 현실로 되돌려보내기 싫어 감독이 직접 세헤라자드가 되어 끝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극장 안에 있는 순간엔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머물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등장하는 엔딩크레딧의 첫 부분은 인덱스(index)이다. 미겔 고미쉬가 <천일야화>라는 영화를 책처럼 구성했음이 드러난다. 영화는 『천일야화』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러닝타임의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며 봐야 하는 일반적인 영화들과는 달리 <천일야화>는 책처럼 목차를 보고 보고 싶은 부분부터 봐도 된다. 영화를 보다 졸았다면 다시 그 챕터로 돌아가면 된다. 엔딩크레딧의 인덱스엔 친절하게 페이지 대신 러닝타임으로 챕터가 표기되어 있다. 덕분에 우리는 <천일야화>를 좀 더 보고서처럼 대할 수 있게 됐다. 미겔 고미쉬의 ‘2013~2014 포르투갈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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