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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7. 2020

2020-02-06

1. 영자원에서 출시한 블루레이를 구매해 김기영의 <고려장>을 봤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를 연상시키지만, 1983년에 나온 이마무라의 작품보다 20년 이른 1963년에 제작된 작품. 110분의 러닝타임 중 25분 가량의 영상이 유실되어 사운드와 시나리오에 기반한 장면설명이 붙어 있는 불완전한 복원판이지만, 4K로 복원된 <고려장>을 만나는 것은 <이어도>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를 처음 관람한 것과 유사한 경험이었다. 김기영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영화는 아무래도 <하녀>겠지만, <고려장>은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지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초반을 장식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김기영의 한 축이 <하녀>로 시작되어 <충녀>, <화녀>, <육식동물>로 이어지는 작품들이고, 다른 한 축이 <이어도>,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등의 '컬트'라면, 이쪽의 시작엔 <고려장>이 있다. 두 축이 유작인 <죽어도 좋은 경험>(천사여 악녀가 되라)에서 만난다고 김기영의 필모를 거칠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2. <고려장> 블루레이에 부가영상으로 수록된 김기영의 1953년도 단편 다큐멘터리 <나는 트럭이다>는 <하녀>의 기묘한 엔딩을 예언하고 있다. 러닝타임 17분의 이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온 유엔군의 트럭이 주인공이다. 트럭을 의인화한 내레이션은 전쟁 동안 망가진 트럭이 전쟁 이후 수리되고, 국가 재건에 투입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엔진을 심장이라 말하는 의인화된 트럭은 그 자체로 근대적 신체, 전쟁에 요구된 기계-신체를 표상한다. 전후 재건을 위해 제작된 프로파간다 영화가 으레 그렇듯, 수리되어 재건 현장에 투입되는 트럭은 전쟁의 상흔을 몸으로 떠안은 상이군인의 신체와 연결된다. 이 영화는 유현목의 <오발탄>처럼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재건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의인화된 트럭의 형상은 파괴된 상태에서 국가에 의해 수리된 상태로 변화한다. 하지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에밀레종(성덕여왕신종)은 무엇인가? 동시기 제작된 여러 '문화영화'들을 통해 그것이 미공보원(USIS)가 설립한 '리버티 프로덕션'의 로고 비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군은 미공보원과 협력해 영화 제작의 주체로 거듭났고, 이들이 제작한 영화는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문화영화들이었다. 이형표, 양종해, 김광이 같은 이들이 문화영화를 연출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의 이름 사이에 놓인 김기영은 독특하게 느껴진다. 재건, 부흥, 반공, 보건 등의 메세지를 직관적인 이미지와 내레이션으로 보여주는 이들의 작품과 <나는 트럭이다> 사이엔 큰 간극이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리버티 프로덕션에선 김기영의 장편 및 극영화 데뷔작인 <죽엄의 상자>를 제작하기도 했다. 리버티 프로덕션의 첫 극영화이기도 한 이영화는 반공영화라는 틀 안에서 여타 문화영화들과 친밀하다. 반면 <나는 트럭이다>에 삽입된 리버티 프로덕션의 로고(에밀레종 이미지 위에 프로덕션 이름이 붙은 숏)는 단순히 로고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는 듯하다. 에밀레종에 얽힌 설화, 수많은 버전이 있지만 어린 아이를 인신공양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설화들은 철을 향한 집착을 보여준다. 설화의 기원이나 진실여부와는 상관 없이, 에밀레종은 인신공양을 통해 완성된 거대한 쇳덩이라는 점에서 전쟁기계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에 동원된 기계들이 재건의 도구로 변모하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린다. 이 지점에서 <하녀>의 기묘한 엔딩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트럭이다>에서 한국전쟁 이후 근대적 신체-기계 이미지 마지막에 지독하게 오독된 신화적 철덩어리를 보여주는 것, <하녀>에서 전후의 탈 규범/탈 윤리적 행위로 인해 파멸을 맞이한 뒤 “다 뻥이지롱~”하면서 검열의 존재를 폭로하는 것은 비슷한 영화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상이군인의 신체를 재건을 위한 신체로 재조직하는 것과 섹슈얼리티의 주체로써의 신체를 규율화하는 것. 두 영화의 엔딩은 전후 한국의 근대적 신체 규율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폭로한다는 점에서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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