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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7. 2020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관람작 간단 리뷰

<야만의 땅> 데이빗 퍼라울트 2019

남북전쟁이 한창인 미국 미주리 주,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따라 북군과 남군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은 채 중립을 유지하던 미국 거주 프랑스 부르주아들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 혼란에 빠진다. 특히 북군이 일반명령 28조를 통해 여성들을 위협하자, 에스더와 자매들을 비롯한 가족은 길잡이 용병 빅터를 고용해 유럽으로 탈출하려 한다. 스파게티 웨스턴 마냥 유럽의 향수를 밀수하다 벌어지는 총격전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에스더의 가족이 탈출을 위한 여정을 시작하며 존 포드의 영화, 특히 <웨건 마스터>처럼 어느 장소를 향해 이동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 대한 영화와 유사한 방향으로 변모한다. 그러다 이들을 추적하는 베티 일당이 등장하며 영화는 다시금 활극의 모습을 띤다. 여기에 에스더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페미니즘적으로 서부극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정확히 이 때문에 <야만의 땅>은 한없이 산만하다. 카메라는 인물들 사이를 배회하며 누구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빅터와 베티의 관계는 에스더와 자매들의 이야기를 자꾸만 영화 주변부로 밀어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활극들과 같은 즐거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좋은 부분만을 담아낸 예고편에 낚였다.

<윌리엄 프리드킨, 엑소시스트를 말하다> 알렉산더 O. 필립 2019

그 동한 히치콕의 <싸이코>, <에일리언> 시리즈, 조지 루카스, 좀비 장르 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알렉산더 O. 필립의 신작은 <엑소시스트>에 대해 윌리엄 프리드킨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아낸다. <엑소시스트>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라던가, 오랜 세월 관객과 평단을 통해 회자되며 다양한 해석이 붙여진 것에 대한 프리드킨의 의견 등을 들어볼 수 있다. 또한 프리드킨이 참조한 영화, 회화,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펼쳐진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라는 점이다. 영화는 (옷이나 배경이 바뀌지 않은 것을 보아 아마도) 윌리엄 프리드킨을 하루 동안 인터뷰하고, 그가 언급한 것에 대한 자료화면, 영화, 음악, 회화, 장소 등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영화는 프리드킨의 말을 고스란히 받아적어, 이런 저런 자료를 덧붙여 보여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런 구성이라면 각종 자료가 하이퍼링크로 삽입된 웹문서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편리한 방식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시그널 100> 타케바 리사 2020

어느 날 한 고등학교의 담임선생이 학급 아이들 전체에게 ‘자살최면’을 건다. 이는 특정 행동을 하게 되면 자살하게 되는 ‘시그널’이 포함된 최면이다. 몇몇의 아이들이 죽고, 선생마저 자살하자, 아이들은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100개의 시그널을 알아내려 한다. 언뜻 <배틀로얄>이 떠오르는 설정을 선보이는 <시그널 100>은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다. 하시모토 칸나를 필두로 한 일본의 젊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전체적으로 크게 특출난 것이 없는 작품이지만, 갖가지 방법으로 자살하는 고등학생들이 보여주는 피의 향연이 ‘부천영화제’스러워서 나름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다. 다만 다소 맥 빠지는 후반부의 몇몇 장면들이 아쉽게 느껴졌다.

<라스트 앤 퍼스트 맨> 요한 요한손 2020

<블레이드 러너 2049>나 <시카리오> 등 드니 빌뇌브의 영화에서 음악을 맡은 것으로 잘 알려진 요한 요한슨의 영화 연출 데뷔작이자 유작이다. 올라프 스테이플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71분 동안 마치 우주선처럼 느껴지는 기괴한 건축물들을 촬영한 16mm 흑백 영상, 틸다 스윈튼이 담당한 인류 종말에 대한 내레이션, 요한 요한손이 작곡한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다. 20억 년 뒤의 미래에서 말하고 있다는 틸다 스윈튼의 내레이션은 미래인의 또 다른 종말을 막기 위해서 과거로 보내진 메시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는 우주적 사건 속에서도, 시공을 거스르는 인류들 간의 연결을 통해 그 속에서 모종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 다만 수차례 같은 말이 반복되고, 그러한 동어반복을 유사한 형상의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서만 전개하려다 보니 흥미로움보단 지루함이 먼저 찾아온다. 우주선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구의 지표면에 붙박여 있는 건축물들이 암시하는 모종의 가능성 정도만이 기억에 남는다.

<무죄가족> 샘 콰 2019

영화를 즐겨보는 자영업자 리웨이지애는 딸이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를 우연히 죽이게 되자 영화에서 봐온 트릭들을 동원해 그 사실을 숨기려 한다. 주인공이 영화를 접하는 순서는 다르지만 언뜻 손재곤 감독의 <너무 많이 본 사나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작년 중국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이 태국이며, 무능하며 시민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공권력을 사용하는 경찰을 비판한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중국을 배경으로는 이런 내용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에 우회적인 방식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의 관객에게는 특히 인상깊을 수도 있는 지점은, 주인공이 관람한 영화 목록에 <살인의 추억>이나 <백야행> 등의 한국영화가 있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트릭으로 김상경과 엄정화가 출연했던 영화 <몽타주>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주제가인 ‘We All Lie’가 등장하기도 한다.(음악감독이 한국인이다) 개인적으로 <트윈픽스>에 출연했던 조안 첸이 경찰서장으로 출연해 반갑기도 했다. 이러한 반가운 지점 외에도, 현재 중국 상업영화가 어떤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말레이시아 감독이 연출한 태국 배경의 중국 상업영화. 이 지점에서 이미 중국 영화시장이 어떤 것을 겨냥하고 있는지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싱크로닉> 아론 무어헤드, 저스틴 벤슨 2019

 <레졸루션>, <스프링>, <벗어날 수 없는>까지 세 작품을 함께 연출한 무어헤드&벤슨 콤비의 신작이다. 뉴올리언스의 구급대원인 스티브(안소니 맥키)와 데니스(제이미 도넌)는 싱크로닉이라는 약물과 연관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데니스의 딸 브리이나가 싱크로닉과 연관된 사건 이후로 실종되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스티브는 가족과도 같은 브리아나를 찾기 위해 약물에 대해 탐구한다. <레졸루션> - <벗어날 수 없는> 연작에서처럼, <싱크로닉> 또한 시간을 다루고 있다. 전작들이 시간의 조작이나 타임루프 등의 컨셉을 사용했다면, 이번 영화는 ‘국지적 타임슬립’이라 할 수 있는 컨셉을 도입한다. 영화 중반, 싱크로닉이 위험한 약물임을 알아챈 스티브를 쫒아온 약물 제작자는 싱크로닉의 원리를 LP와 턴테이블의 바늘로 설명한다. LP의 트랙이 시간이라면, 싱크로닉은 LP위에서 특정한 소리를 내는 그 지점에 올라간 바늘과도 같다. <벗어날 수 없는>에서 타임루프버블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처럼, 싱크로닉을 통한 국지적 타임슬립의 묘사도 흥미롭다. 또한 흑인인 스티브가 일상적으로 겪는 인종차별들을 타임슬립과 결부시키는 아이디어 또한 인상적이다. 마무리가 다소 식상하고 애매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적당한 방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타임루프나 타임슬립이라는 다소 식상한 소재를 다룸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계속 이어간다는 점에서, 무어헤드&벤슨 콤비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

<성범죄자를 잡아라> 바르보라 찰루포바, 비트 클루삭 2019

체코에서 온라인 아동 성학대에 대한 실험을 진행한다. 3명의 성인 여성 배우들에게 12살 아이를 연기하게 하여, 가짜 채팅 계정을 만들어 남성들이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다. 영화가 담아낸 결과는 놀랍기만 하다. 계정을 생성한지 5분만에 20명이 넘는 성인 남성들이 채팅을 걸어왔고, 거의 모든 이들이 누드사진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고, 자위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영화에 따르면 10일 동안 진행된 촬영기간 동안 2500명이 넘는 남성들이 채팅을 통해 세 배우에게 접근하였다. 영화는 이 과정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디지털 성범죄가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특히 아동 청소년들이 인터넷에 무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작된 <성범죄자를 잡아라>는 그것의 심각성과 끔찍함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촬영 현장엔 성과학자, 수사관, 변호사 등이 대동하였으며 세 배우에게 물리적인 가해가 벌어지는 상황은 없었지만,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끔찍함이 다가온다. 특히 작업에 참여한 여성 분장사가 중년인 자신의 지인이 채팅에 참여하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은, 디지털 성범죄가 당장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문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다만 이를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가짜 누드사진을 제작하는 장면이라던가 가해 남성이 보낸 아동포르노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면 등은 불필요하며 영화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물론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음에도, 똑같이 모자이크처리가 된 가해 남성들의 성기를 보여주는 것과 앞서 언급한 이미지들은 명확히 차이가 있다. 또한 스카이프 영상을 보여줄 때, 화상채팅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을 가해 남성이 보고 있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 또한 지나치게 많았다. 영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작용하는 이미지들이 적지 않게 들어 있다는 점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제작진과 체코 경찰의 협력을 통해 수사가 시작되었다는 마지막의 자막은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시도였음을 알려준다. 기사를 찾아보니 지난 2월 1명의 가해 남성이 징역형을 선고받아 복역중이며, 4명의 용의자를 대상으로 여전히 수사가 진행중이고, 5월 또 한 명의 가해 남성이 기소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한 가해 남성들의 수에 비해면 턱없이 적은 숫자이지만, 이러한 결과가 유의미하길 바란다.

<저스티스의 총알을 받아라> 발레리 밀레프 2019

불가리아 출신 감독과 카자흐스탄 출신 배우가 만나 협력한 작품이다. 영화는 히틀러가 완수하지 못한 유전자 변형 군인 프로젝트가 재가동된 결과로 돼지인간인 ‘머즐’이 탄생하고, 이들과 벌인 3차대전에서 패배한 인간들이 저항군을 꾸려 공격을 준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놉시스를 읽고 든 생각은 작년의 화제작이었던 트로마의 <돌연변이 대격돌>과 같은 작품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웃기고 즐길만한, 그러한 영화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처구니없고 지루한 작품이었다. 인간이 돼지인간의 식량으로 전락하고 인간 농장이 등장한다는 설정은 재밌을 수 있는 셋팅이지만, 영화는 무엇 하나 제대로 밀고 나가지 못한다. 재기발랄함과 지루함, 불쾌감은 한 끗 차이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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