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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9. 2020

2020-09-19

1. 어제(9월 18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의 짧은 후기

<상실과 아름다움> 피에트로 마르첼로 2015

유운성 평론가가 참여한 '사실의 우화: 이탈리아 다큐멘터리스트 3인전'의 상영작으로, 다음 달 첫 극영화 연출작인 <마틴 에덴>의 개봉을 앞둔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작품이다. 영화는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에 버려진 카르디텔로 성을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토마소라는 이름의 양치기의 이야기다. 하지만 토마소는 러닝타임의 절반이 채 흐르기 전에 사망한다. 그 대신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초반부에 등장한 어딘가 초월적인 존재자처럼 느껴지는 가면 쓴 이들 중 하나인 풀치넬로와, 토마소가 우연히 발견해 카르디텔로 성에서 기르던 어린 물소 사르키아포네다. 사자(使者)와 같은 인물로 묘사되는 풀치넬로는 사르키아포네와 대화할 수 있다. 마르첼로는 내레이션의 힘을 빌려 음유시인 같은 물소의 말을 전달한다. 때문에 <상실과 아름다움>은 토마소가 등장하고 그를 인터뷰한 논픽션 푸티지와, 그가 사망한 뒤 풀치넬로와 사르키아포네의 이야기를 다룬 픽션 푸티지가 뒤섞여 있다. 영화를 같이 본 한 지인은 촬영 중 토마소가 급사하여 영화의 방향이 틀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꽤 동의한다. 토마소가 관리하던 카르디텔로 성은 갱이나 부랑자들이 숨어 살던 곳이다. 정부는 그곳을 관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소가 죽은 뒤, 그 성은 드디어 정부의 관리에 들어가고 이탈리아 국민들이 찾을 수 있는 곳이 된다. 이들은 토마소를 상실하고서야 그 성의 아름다움을 알아본다. 달리 말하며, 성의 아름다움은 정부-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승인을 통해 공인된다. 상실된 토마소의 아름다움은 풀치넬로와 사르키아포네의 여정으로 옮겨간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어린 물소를 보살펴달라는 토마소의 마지막 소원을 영화로 구현한다. 다만 실화, 신화, 민담을 뒤섞은 이 이야기가 아주 와닿지는 않았다. 아침 첫 상영이라 컨디션이 안 좋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루카 코메리오의 키네마컬러> 루카 코메리오 1912

루카 코메리오는 이탈리아의 초키 다큐멘터리스트 중 한 명이다. 그의 기록영화들은 후에 안젤라 리치와 루키예르반트 지아니키안의 아카이브 영화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들 영화의 크레딧에 루카 코메리오가 촬영으로 올라가 있기도 하다. <아프리카 원주민 병사들의 생활>, <강을 건너는 기병대> 등 직관적인 제목의 영화들이 담은 내용은 너무나도 제목 그대로라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키네마컬러'라는 초기 색채영화 기술이다. 영화 상영 전 진행된 유운성 평론가의 설명에 따르면, 키네마컬러는 멜리에스의 영화나 몇몇 무성영화에서 볼 수 있는 틴팅기법처럼 필름에 직접 채색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1908년 영국에서 개발된 키네마컬러는 적색과 녹색의 필터를 카메라 앞에서 각 색이 초당 16번 오도록 회전시키고, 이에 맞춘 초당32프레임의 속도로 흑백 필름을 돌려 촬영한 뒤, 영사기 앞에 역시 적색/녹색 필터를 둔 채로 영사하는 방식이다. 컬러필름이 아니라 흑백필름을 활용했으며, 빛의 3원색 중 청색이 빠져있는 만큼 '천연색'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현실에서 벗어난 색채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에 보던 적색/청색 샐로판지 안경을 끼고 보던 조악한 3D 그림책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키네마컬러는 1915년 업계에서 퇴출되는데, 이는 적색과 녹색의 프레임이 번갈아가며 영사되는 방식이기에 움직이는 대상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색의 분리 현상이 발생하며 눈에 피로감을 심하기 유발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3D 기술이 눈에 부담을 주는 것과 유사한듯 하면서도 사뭇 다른 이유다. 이러한 색의 분리 현상이 상당히 독특한 감흥을 주는데, 프레임 내에서 운동하는 모든 객체, 가령 달리는 사람이나 말, 흐르는 강,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등이 맹렬하게 운동하던 끝에 금방이라도 소멸할 것만 같은 느낌을 풍기기 때문이다. 마치 디지몬이 디지털 세계에서 사라질 때 픽셀로 분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늑대의 입> 피에트로 마르첼로 2009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첫 장편영화이다. 영화는 14년만에 감옥에서 출소해 감옥에서 만난 동반자 메리가 있는 우중충하고 쇠퇴한 항구마을에 도착한 엔조를 따라간다. 두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시골집에서 강아지들과 함께 사는 것이 꿈이다. 유운성 평론가는 10년 전 씨네21에 기고한 글에서 톰 앤더슨, 가이 매딘, 테렌스 데이비스 등이 노년기에 연출한 '도시 에세이' 영화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20세기 초에 연출한 영화들을 끌어오는 미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포르투에서의 어린 시절>과 같은 작품들을 열거하며, 이러한 영화들이 어느 정도의 신체적 연령을 지닌 감독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33살의 나이에 <늑대의 입>을 내놓은 피에트로 마르첼로가 이를 깨부쉈다고 말한다. 마르첼로는 자신의 신체적 연령이 어리기 때문에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도시를 충분히 나이 든 엔조와 메리의 신체와 경험에서 구한다. 비록 엔조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그가 먼저 출소한 메리와 나눈 면회외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음성을 통해 쇠락해가는 도시는 그에게 가야할 곳으로 이미지화된다. 마르첼로는 단순히 항구마을에 돌아온 엔조와 그를 기다리던 메리의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엔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철거되는 항만의 건물, 빈민가의 골목길, 출항하는 배 등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 이미지들은 젊은 마르첼로의 신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대리하는 엔조와 메리의 직간접적으로 경험된 도시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구마을을 거쳐간 모두의 공통된 이미지가 아닌, 오랜 시간을 감옥에서 보낸 마초 남성과 그의 동반자이며 오랜 시간 마을의 골목을 지켜 온 트랜스여성, 두 사람이 간직한 비밀스러운 사랑의 이미지이다.

<레이와 시대의 반란> 하라 카즈오 2019

영화는 2019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정당 '레이와 신센구미'의 선거과정을 따라간다. 배우 출신 정치인 야마모토 타로가 창당한 레이와 신센구미는 2019년 선거를 통해 2명의 비례대표 당선인을 배출하면서 정식 정당 요건을 채우게 되었다. 영화는 선거에 출마한 레이와 신센구미의 10명의 후보자들을 쫓아간다. 그 중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도쿄대 인문사회학부 교수인 야스토미 아유미이다. 그는 트랜스여성이며, "아이들을 지키자"를 자신의 정치의 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2016년 시장선거에도 출마했던 그는 당시 말을 타고 거리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선거 유세를 치뤘던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영화에는 그 외에도 창가학회 기반의 정당인 공명당에 반대하는 창가학회 신도 노하라 요시마사, 루게릭 환자이며 기타리스트인 후나고 야스히코, 뇌성마비 중증장애인 키무라 에이코, 노숙인이었던 파견 노동자이자 싱글맘인 와타나베 테루코, 그 밖에 부당하게 퇴출된 편의점 점주, 환경운동가, 원전 노동자, 전 은행원 등이 후보자로 나섰다. 이들의 의제와 성격은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야마모토 타로는 창당 3개월만에 이들을 모아 선거운동에 나섰고, 200만표가 넘는 득표를 기록해 후나고 야스히코와 키무라 에이코, 두 사람이 당선되었다. 하라 카즈오는 약 한 달 정도의 선거운동과 그 이후의 짤막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248분이라는 방대한 러닝타임을 겪으며 떠올린 영화는 다소 뜬금없게도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였다. <더 포스트>는 트럼프 당선 이후 기획부터 개봉까지 단 9개월만에 완료된 작품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첫 촬영일은 2019년 6월 말이며, 영화가 촬영된 마지막 날짜는 9월이다. 이 영화는 2019년 10월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스필버그는 미국 대선 직후, 하라 카즈오는 일본 참의원 선거 직후 영화를 내놓았다. 각각의 방식과 정치적 입장, 관점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누구나 읽어낼 수 있는 소수자 의제를 내세운 영화들을 만들었고, 정치적인 입장을 전면에 내세운 채 정치적인 독해를 불러일으키는 시기에 영화를 공개했다. 스필버그가 고전적 품위를 선보이는 정치영화를 만들었다면, 하라 카즈오는 <천황 군대는 진군한다> 등 그가 그간 선보인 여러 영화들처럼 액티비즘적 성격이 두드러진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도쿄는 물론 오사카, 홋카이도, 교토, 오키나와 등에서 선거운동을 벌이는 야스토미 아유미를 담아낸다. 그는 학생의 자유를 탄압하는 교토대 앞에서 수업을 하고,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대담을 나누는 자리에선 아이들이 자유롭게 악기를 연주하고, 말을 타고 시내 한 복판을 다니며 도시 한가운데 놓인 말의 존재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준다. 물론 그의 행동과 말 모두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모습은 정치는 무엇을 향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인간조차 도시의 기호화에서 생략되고 있다”는 그의 말과 함께, "로열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를 사용하지 못했으니 음악은 상상해주십시요"라는 자막이 무색하게 기괴한 소리를 폴리로 제작해 삽입한 플래시몹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2. 오늘은 인천에 가서 디아스포라 영화제 상영작인 스와 노부히로의 신작 <바람의 목소리>를 봤다. 전주영화제 장기상영회가 코로나19 재확산으로 무산되며 놓치게 되어 아쉬웠는데, 다행히 기회가 되어 보게 되었으나... 기대했던 것보다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아직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밖에 못 봤기 때문일까? 아래는 간단한 후기

<바람의 목소리> 스와 노부히로 2020

하루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부모님과 어린 남동생을 잃었다. 그는 히로시마에 있는 숙모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숙모가 쓰러지고, 혼자가 된 하루는 자신이 살던 이와테현 오츠지로 돌아가려 한다. 그 길에서 하루는 다양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을 만난다. 산사태로 마을이 없어진 사람, 아빠가 사라진 아이를 임신중인 여성,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출입국관리소에 구금된 쿠르드인의 가족,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던 남성, 세상을 떠난 아빠에게 전화를 하러 오츠지 '바람의 전화'를 찾아 온 소년. 1945년의 히로시마부터 2011년의 이와테현, 그리고 현재 상실을 겪은 사람들을 영화는 같은 층위에 배치한다. 누군가는 우울해하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힘차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살아있으면 먹어야 돼"라며 음식을 권하며, 누군가는 자신을 도운 이를 찾아 나서고, 누군가는 과거를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렸다. 하루의 여정은 자신과 모두의 고통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소화해내 바람에 흘려 보내는 것이다. 수신자에게 닿지 못할 전화기를 향한 여정이라는, 영화의 간단한 목표는 홀로 남은 하루의 고독감, 슬픔, 고통과 히로시마, 후쿠시마, 쿠르드 난민, 갑작스레 가족을 잃은 상황을 같은 층위의 것으로 연결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띄는 장면은 하루가 우연히 만난 모리오와 함께 후쿠시마에 진입하는 장면이다. 달리는 차량 내부에서 밖을 촬영한 장면은 이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하루는 언제나 차량 밖으로 벗어날 것이 정해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필로와 진행한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후쿠시마를 가로지르는 60번 국도는 방사능량이 높은 출입금지구역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정차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촬영되었다고 한다. 물론 영화를 보면서 이 사실을 알긴 어려웠고, 다큐멘터리적인 후쿠시마의 풍경 숏이 후쿠시마에 도착한 하루가 자신의 가족을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이어지며 영화가 어딘가 방향성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또한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과 장 피에르 레오가 그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뒤섞여 있다. 반면 <바람의 목소리>에서 후쿠시마의 풍경을 바라보는 숏이 주는 감각은 유독 독특하다. 그 숏이 영화에서 재해로 파괴된 공간을 보여주는 유일한 숏도 아니다. 3.11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실재에 기반한 허구적 이야기를 보다가 갑자기 그 실재를 고스란히 촬영한 숏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하루가 경험한 초현실적인 상황이 영화에서 가장 실제와 가까운 숏과 가까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물감이 더욱 강하게 든 것일까? 스와 노부히로는 <바람의 목소리>를 찍으며 마음에 둔 한 단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도'라 대답한다. 생각해보면 이물감이 들었던 두 장면은 기도라는 관념적 행위와 그것이 도달해야 할 물질적 공간을 연달아 보여주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3. 내일부턴 다시 DMZ로... 보려던 영화가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고 있다. 자기 전에 영자원 VOD 기획전이나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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