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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Oct 20. 2020

<마틴 에덴> 피에트로 마르첼로 2019

 이 영화는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첫 장편 극영화이다. 물론 그의 여러 전작들이 논픽션과 픽션이 혼재된 방식의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있지만, <마틴 에덴>처럼 영화 전체를 극으로 꾸민 것은 처음이다. 영화는 20세기 중반 무렵의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다. 가난한 선원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은 우연히 깡패에게 맞고 있는 한 청년을 구한다. 부잣집 자제였던 그는 마틴 에덴에게 가족을 소개해주고, 마틴은 그곳에서 만난 엘레나(제시카 크레시)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엘레나는 초등학교도 끝마치지 못한 마틴 에덴에게 마저 공부하길 바란다고 말하며 여러 책들을 빌려준다. 총명한 마틴은 문법을 공부하고 새로운 어휘들을 익혀가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어느새 문학 작가의 꿈을 꾼다. 마틴은 계속 여러 신문과 잡지에 소설과 시를 투고하기 위해 교외 지역에 방을 얻고 글쓰기에 매진한다. 하지만 투고는 계속 실패하고, 엘레나의 부모님은 그와 마틴의 결혼에 반대한다. 영화는 잭 런던이 1909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미국 오클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당연히 이번 영화와 시대적 배경도 다르다.

 그런데 <마틴 에덴>의 시대적 배경은 어딘가 불분명하다. 국내 수입사가 제공한 시놉시스에 따르면 ‘20세기 중반’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60년대 중반 이후 상용화된 테이프 녹음기가 등장한다. 마틴 에덴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이크에 대고 녹음하고 있다. 그다음 숏은 열화되어 녹아내리기 직전처럼 보이는 몇몇 아카이브 푸티지이다. 20세기 초에 촬영된 영상처럼 보이는 이 화면은 기차가 출발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군중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은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며 터널 외부의 빛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하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아카이브 푸티지가 종종 등장한다. 침몰하는 배, 패딩을 입고 춤추는 두 아이, 항구를 떠나는 배 등등. 마틴의 심상처럼 등장하는 아카이브 푸티지들은 그가 살고 있는 시간대의 과거와 미래를 포괄한다. 사실 이는 아카이브 푸티지가 아닌 장면들에서도 이어진다. 부둣가에 앉아 있는 마틴의 뒤로 지금의 나폴리 컨테이너 터미널의 모습이 보이고, 이탈리아에는 70년대 후반에나 보급된 컬러 TV가 등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여러 빈민들이 공장에서 노동하는 모습이 등장하고, 파업을 주도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1950~6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탈리아 경제기적 시기의 끝무렵, ‘납탄 시대’라 불리는 60년대 말~70년대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즉, <마틴 에덴>의 마틴 에덴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사이 언젠가의 이탈리아라는 시대에 정박해 있지만, 선원이라는 그의 정체성처럼 그가 경험하는 이미지는 20세기의 곳곳을 떠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첫 장편영화 <늑대의 입>에서 유사한 형식을 선보였었다. <늑대의 입>은 오랜 시간 수감되었던 한 남성이 고향인 항구마을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를 만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영화는 이들의 생활 모습, 인터뷰, 그리고 도시를 촬영한 여러 아카이브 푸티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20여 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 남성이 마주하는 도시의 현재와 그곳에서 그를 기다려온 아내가 경험한 도시의 역사 등이 아카이빙된 이미지들로 펼쳐진다. <마틴 에덴>은 이러한 형식을 마틴 에덴이 집필하는 글들의 심상처럼 사용한다. 그가 몸으로 직접 경험한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의 과거-현재-미래는 ‘경험’이라는 심상으로 농축되고, 그의 글 안에서 드러난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는 과거(마틴 에덴이 존재하는 시대)를 향하지만, 언뜻 마틴 에덴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아카이브 푸티지들은 그를 20세기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인물로 변화시킨다.

 마틴은 사회주의자들을 니체의 ‘노예 도덕’ 개념으로 반박하고 비난한다. 이는 1909년 잭 런던의 소설에서 이미 정립된 것이다. 이 질문을 영화가 제작된 2019년으로 고스란히 끌어오는 것은 당연히 무리고, 영화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다만 영화는 소설과는 조금 다른 결말을 제시한다. 마틴 에덴이 물에 빠져 자살하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는 마틴 에덴이 과거의 자신을 본듯하며 바다에 빠지는 듯한 암시만을 준다. 그리고 어느 해변에 떠밀려온 마틴 에덴은 “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어느 노인과 장비를 정비하는 군인들을 목격한다. 군인들은 노인을 조롱한다. 마틴 에덴은 석양이 지는 바닷속으로 달려 들어간다. 여기서 마틴 에덴의 애매한 열정, 다시 말해 엘리트 문학계에 오롯이 속할 수 없었던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노동자라는 그의 상황과, 마초적이며 다소 폭력적이고 자의식과잉이라 느껴질 수 있는 그의 면모는 20세기라는 시공간에 정박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정박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닌 배의 행위이다. 그는 선원이지만 끝내 배에 타지 못하고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든다. 과거의 이미지를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던 그는 내일을 예고하는 석양을 따라간다. 지극히 20세기적인 인물인 그는 영원히 20세기라는 바다를 떠돌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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