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여러 영화처럼, <시티홀>은 시청을 찍는다.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정권 집권기인 2018년의 보스턴 시청과 당시 시장이었던 마티 월시(현 미국 노동부 장관), 그리고 보스턴 곳곳에서 활동하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을 담는다. 때문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나 <내셔널 갤러리>처럼 특정한 공공공간 하나에 집중한다기보단, <인디애나 몬로비아>나 <버클리에서>처럼 한 지역 전체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랬듯 카메라 앞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지 않는다. 대신 보스턴이라는 공간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개인 간의 역동을, ‘도시’라는 유기체가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뿐이다.
당연히 관찰에는 관찰자의 관점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특히 편집을 통해 관찰된 화면에 연출자가 개입하게 되기에, 와이즈먼의 영화는 언제나 존재하는 공동체/공공기관/지역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기보다 그의 관점이 투영된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 조금 더 옳은 설명일 것이다. <시티홀> 속 몇몇 장면을 떠올려보자. 30년간 보스턴의 건설업 중소기업을 운영해온 라틴계 미국인 시민은 관계자의 정책 설명을 듣고 “백인들로 가득한 대기업은 몇천만 달러짜리 사업을 시에서 받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 성장하지 못한다.”라고 반문한다. 관계자는 그러한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이라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의 설명이 채 끝나기 전에, 그보다 상위의 시청 관계자가 “의심은 없습니다”라며 새로운 설명을 이어간다. 혹은 미국 재향군인의 날에 참전용사 회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는 이라크나 베트남에 다녀온 참전용사들의 발언에 앞서, 보스턴의 역사가 담긴 그림들을 담는다. 역사의 순서를 고스란히 따르는 그림들의 몽타주는, 17세기 영국 청교도 개척자들의 도착부터 보스턴 차 사건까지의 사건들을 보여준다. 참전용사들의 발언 사이사이엔 공간에 전시된 양차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당시의 무기들을 비롯한 전시품들이 놓여 있다. 이 장면은 1차대전에 참전한 삼촌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참전용사들의 PTSD를 자신의 알코올 중독 경험과 등치시키는 시장의 연설로 끝난다.
물론 <시티홀>이 보스턴 시청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관료제의 폐해를 보여주려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들이 열정적으로 보스턴 행정을 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청년이 시청 관계자 및 예술가와 도시의 노숙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쉼터를 계획하는 장면이라던가, 장애인 위원회가 도시 곳곳의 접근성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처럼, 보스턴의 여러 여성,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인종 커뮤니티 등으로 구성된 여러 위원회, 단체 등에서 진행하는 다양하고 열정적인 논의가 계속 등장한다. 와이즈먼이 <뉴욕 라이브러리>와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영화는 공적인 영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트럼프의 미국 아래에서도 인종, 성별, 성적지향, 계급, 나이에 따른 차별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의 역동이 <시티홀>의 가장 큰 축을 이루며,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합법 대마초 상점의 개장에 앞서 사업가들과 지역 주민들의 모임을 담은 장면에서 그러한 역동의 절정이 드러난다.
하지만 <시티홀>에서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했던 관료제의 함정 혹은 구멍을 드러내는 듯한 장면들이다. 2017년의 인디애나주 몬로비아를 담은 <인디애나 몬로비아>와 대비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트럼프 정권 당시의 미국 남부를 보여준다. 이들의 공동체는 지극히 민주적이고, 지극히 보수적이다. 영화는 백인 기독교도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낙농업이 주 수입인, 20, 30대는 도시로 떠났으며 지역에서 평생을 살거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돌아온 이들만이 남은 몬로비아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들이 등장하는 사이사이에 하수처리장의 오물, 우리에서 이송되어 나오는 돼지 떼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외침이 들릴 것 같은 미국 중서부의 농촌 정경,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 가로로 길게 펴지는 농약 뿌리는 농기계의 모습이 등장한다. 결국 와이즈먼은 중서부 미국의 소도시라는 공간을 대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회유적으로, 그리고 분산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인디애나 몬로비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누군가의 출생, 탄생은 담기지 않는다. 와이즈먼은 <인디애나 몬로비아>에서 공동체의 생명이 끝나가는 시기를 포착하려는 것만 같다. 즉 미국이 자랑스레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극적인 보수화 과정을 겪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티홀>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보스턴의 모습을 보여주며, 반대로 민주적인 절차와 사상에 따라 모든 이를 배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노숙인 쉼터에 대한 이야기나, 대마초 사업에 대한 질의응답 모임에서 지역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과 사업가 사이의 격렬한 토론을 보고 있자면, <뉴욕 라이브러리> 등 와이즈먼의 전작에서 드러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문단에서 언급했던 관료제의 함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 혹은 아일랜드계 천주교인 시장이 보여주는 어떤 태도들에서 무엇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민주주의적 열망의 실천 속 모순이 드러난다.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지극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보수화되는 곳을, <시티홀>은 보수화의 흐름 속에서 노력하지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와이즈먼은 <시티홀>의 마지막에서야, 보스턴하면 떠오르는 항구와 바다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음 들어온 곳, 그들이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사건이 벌어진 곳, 재향군인회 건물에 걸려 있던 그림 속 사건들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며, 이 영화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