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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06. 2021

반복을 긍정해보기

<팜 스프링스> 맥스바바코우2020

*스포일러 포함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팜 스프링스의 리조트에서 결혼식이 열린다. 하지만 화려한 결혼식은 타임루프에 갇힌 나일스(앤디 샘버그)에겐 이미 수만 번 반복된 결혼식이다.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가던 나일스는 신부의 언니인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에게 다가간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나일스는 로이(J. K. 시몬스)라는 남자에게 습격당하고, 두 사람을 쫓아가던 세라마저 타임루프에 빠지게 된다. 여러 단편 코미디 영화를 연출해온 맥스 바바코우의 첫 장편영화 <팜 스프링스>는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의 오리지널 영화로 SNL 출신의 스타 앤디 샘버그가 제작과 주연을 맡기도 했다. 타임루프를 소재로 삼은 로맨틱 코미디라는 점에서 <사랑의 블랙홀>이나 <어바웃 타임>과 같은 작품들이 떠오르지만, <팜 스프링스>는 앞선 영화들과는 다소 다른 길을 걸어간다.

 타임루프 영화로서 <팜 스프링스>가 가장 특별한 지점은 동시에 여러 인물이 루프에 빠진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타임루프 소재 영화는 루프에 빠진 인물 한 명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끌어 나간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타임루프를 경험한 인물은 둘이지만 타임루프에 구속된 인물 자체는 한 명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넷플릭스 드라마 <러시아 인형처럼>처럼 두 인물이 함께 타임루프를 경험한다던가, 저스틴 벤슨과 아론 무어헤드 콤비의 <타임루프: 벗어날 수 없는>처럼 수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루프 속에 갇히게 되는 설정도 종종 등장하긴 했다. <팜 스프링스>는 이러한 작품들과 같은 예외에 가깝다. 나일스는 이미 수만 번의 루프를 겪으며 루프 이전의 자신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며, 로이는 자신을 루프에 빠지게 한 나일스에게 복수를 반복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루프를 시작하는 곳이 각자 다르다는 점이다. 나일스와 세라는 리조트의 숙소 침대에서 깨어나고, 로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깨어난다. 대부분의 타임루프 영화가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 안에서 일어난다면, <팜 스프링스>의 인물들은 자동차를 이용해 꽤나 멀리까지 이동한다. 다른 작품들은 도시나 어떤 마을에 머무른다면, <팜 스프링스>의 배경은 사막으로 둘러싸인 외딴 리조트다. 나일스와 세라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 위해 어딘가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물론 <팜 스프링스>가 단순히 대부분의 타임루프 영화와 조금은 다른 설정을 지녔기 때문에 재밌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가장 최근에 국내 개봉했던 타임루프 영화인 <리스타트>를 떠올려보자. 주인공은 내레이션으로 끝없이 떠들고 있으며, 반복되는 루프를 빠른 편집으로 보여주며 웃음을 유발하려 한다. 그에 비해 <팜 스프링스>는 느릿한 리듬을 유지한다. 나일스가 처음 잠에서 깨는 영화의 초반부는 무엇에도 즐겁지 않아 보이는 나일스의 권태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눈을 뜨자마자 애인인 미스티(메레디스 하그너)와 섹스를 하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고,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억지로 가족행사에 끌려온 사람처럼 멍한 표정의 하와이안 셔츠 차림으로 서 있다. 세라 대신 축사를 하고 복잡한 춤판 속에서 사람들의 동작을 따라 하는 그의 모습은 아직 타임루프의 존재가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오랜 시간 루프를 반복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게 해 준다. <팜 스프링스>는 그간 앤디 샘버그가 출연해온, <브루클린 나인 나인>이나 론리 아일랜드의 뮤직비디오와 정신 사나울 정도로 빠른 속도감의 코미디들과는 정반대의 리듬을 택한다. <팜 스프링스>가 다른 타임루프 영화들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사실 이런저런 설정이 아니라 영화의 속도감이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단점이 아닌 장점이다.

 이러한 선택은 다른 타임루프 영화보단 차라리 스티븐 소더버그의 하이스트 코미디 <로건 럭키>를 떠올리게 한다. <팜 스프링스>에서 나일스는 수없이 반복되는 나날을 살아가는 것을 무의미로 정의한다. 그는 늙지도 않고 어딘가로 떠날 수도 없는 루프 속에서 결혼식에 참여한 거의 모든 이들은 물론 리조트 주변의 낡은 바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년들과도 잠자지를 갖지만 딱히 그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없다. 그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하루의 누적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그에겐 로이처럼 집과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끌려온 누군가의 결혼식장에서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오늘’로 수렴되는 루프 속에서 그는 무엇도 찾지 못한다. 루프를 통해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으며 결혼식장에서 하루 동안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알게 된, 소박한 전능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얻게 되었지만, 이는 그로 하여금 루프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포기하게 될 정도의 권태감을 부여한다. 이는 한탕으로 큰돈을 벌어 사치를 즐기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는 대부분의 하이스트 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소박한 금액을 노리는 <로건 럭키> 속 일당을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놓인/진행할 상황 속에서 어딘가로 나아가는 것 대신 현재에 머무르는 것을 택한다.

 때문에 <팜 스프링스>에서 세라의 존재감은 독특한 방식으로 발휘된다. 나일스와 함께 권태 속에서 쾌락주의적인 반복을 이어가던 와중 세라는 자신이 반복하는 ‘오늘’이 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을 떠올린다. 세라에게 ‘오늘’에 머문다는 것은 그 일을 끝없이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세라는 타임루프를 탈출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탈출이 이들에게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두 주인공 사이의 사랑이 중요하게 다뤄지고는 있지만, 영화가 두 사람을 다시 함께하게 하는 장면은 앤디 샘버그 특유의 ‘말발’을 살린 장르적 의무방어전에 가깝다. 오히려 이들이 루프를 탈출한 이후에도 루프 속에서와 유사한 모습으로 지낼 것으로 추측된다는 점에서, 마지막 루프를 루프 이후의 삶을 위해 안정적으로 마무리하고 탈출하는 세라의 모습은 반복되는 ‘오늘’에서 벗어나 미래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진 않지만 여전히 루프 속 오늘에 가까운 곳으로 진입하는 것에 가깝다. 다시 말해 이들은 루프 밖에서도 루프 속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루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나일스의 모습은, 어차피 오늘과 같은 나날이 반복될 예정이기에, 반복되는 하루의 안정성을 벗어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본래의 오늘이 두렵다는 말과 같다. 이 지점에서 <팜 스프링스>의 두 주인공은 <로건 럭키>의 일당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로건 럭키>의 일당이 트럼프 시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반복되는 오늘을 구제하는 방식으로 하이스트를 택한다면, <팜 스프링스>의 두 주인공은 불확실성마저 반복의 요소로 긍정하려 한다. 반복 밖으로 나아가는 대신 반복을 긍정하는 영화의 선택이 사뭇 흥미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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