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09. 2021

위키피디아의 각주 같은영화

<암살자들> 라이언 화이트 2020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국제공항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이복형제 김정남이 암살당한다.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벌어진 암살사건의 용의자로 두 젊은 여성이 지목되어 체포된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시티 아이샤와 베트남 출신의 도안 티 흐엉이 그들이다. 영화 <암살자들>은 김정남을 둘러싼 북한의 정치적 상황을 워싱턴포스트의 북경지부장 안나 파이필드의 목소리를 통해 설명하고,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인 하디 아즈미를 통해 두 여성의 재판 과정을 추적한다. 재판이 모두 끝난 것은 2019년 5월이며, 그해 3월과 5월 시티와 도안은 각각 석방되었다. 영화는 북한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어떤 군사적 훈련을 받지도 않은 것만 같은 두 여성이 어떻게 암살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암살자들>은 크게 새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다. 가능한 두 여성(과 그들의 변호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김정남 암살 사건을 기록한 온라인 상의 문서들에 담긴 정보를 영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암살자들>의 연출을 맡은 라이언 화이트의 필모그래피는 축구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제작한 공동연출작 <펠라다> 이후 관심사에 따라 작품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틀스의 팬클럽 회장으로 활동했던 프레다 켈리를 중심으로 비틀스를 회고하는 <프레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틀스>, 캘리포니아 동성결혼 금지 폐지를 위해 투쟁한 이들을 담은 <더 케이스 어게인스트 8>,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섹스 테라피스트인 루스 웨스트하이머에 대한 <애스크 닥터 루스>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캐서린 세스닉 수녀 살인사건을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천사들의 증언>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소위 ‘선댄스 영화’ 혹은 ‘넷플릭스 영화’라고 불릴 법한 소재와 작품들로 가득하다. (여담이지만 <암살자들>의 국내 배급은 왓챠가 맡았다) 

 <암살자들>도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추적 다큐멘터리’라 불리는 여러 영화들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을 담아내는 것과 다르게, 모든 상황이 끝난 이후 공개된 이 영화에 담긴 내용은 여러 위키피디아 문서에 담긴 것을 보충하는 것에 그친다. 영화 속에서 주목할 지점은 시티와 도안이 소설미디어를 제 몸처럼 이용하던 젊은 여성이었다는 것과 ‘장난 비디오’가 유행하던 당시 동남아의 상황을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재판 중 판사가 도안과 시티가 출연한 비디오가 “재미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을 장난 비디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그 영상의 증거능력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 소셜미디어를 신체와 자아의 확장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감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암살자들>이 CCTV 영상을 재구성한 CG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얼핏 <이카루스> 같은 최근의 ‘추적 다큐멘터리’ 흥행작들의 경향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계속하여 유출되는 상황을 추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만의 흥미로운 지점으로 다가온다. 다만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암살자들>은 사건을 기록한 위키피디아 문서의 각주로만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렬한 감정의 스펙트럼과 덜컹이는 시점 전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