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2021년 12월 12일 진행된 씨네미루의 세 번째 상영회 [기록과 재구성]에서 배포된 글입니다.
“기록한다”라는 행위는 모두의 습관이다. 동굴 벽화에서 다큐멘터리까지, 손으로 쓴 일기부터 SNS 피드까지, 기록은 그 매체를 바꿔왔을 뿐 인류사를 이끌어온 모든 것의 기반이나 다름없다. 기록이 무엇이 될지는 기록을 가공하고 재구성하는 이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그 형태에 따라 기록은 개인적 감정의 표현부터 역사적 사실의 기록까지, 예술과 철학에서 정치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것으로 변화한다. 영화를 포함한 영상매체에 한정해 말해보자. 8mm, 16mm 필름은 휴대용 영화 카메라를 등장케 했으며, 유럽과 북미의 상류층은 이 카메라들로 홈비디오를 촬영했다. 홈비디오에는 결혼식 같은 가족행사나 일상생활 외에도 세계일주 등의 이벤트가 기록되기도 했다. 계속하여 필름을 사용하던 영상 카메라는 1950~60년대 사이 방송의 영역에서 비디오 카메라로 조금씩 대체되었지만, 1983년 소니가 휴대용 비디오 캠코더를 출시하기 전까지 일상의 영역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휴대용 비디오 캠코더의 등장은 필름으로 영상을 찍을 수 있었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 모았다. 이는 장 뤽 고다르, 델핀 세리그와 카롤 루소풀로, 백남준을 비롯한 플럭서스 멤버들 등 기존에 영화와 미술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에게 기동력과 역동성을 갖춘 새로운 매체로서 받아들여졌다. 동시에 더 많은 대중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방영 중인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비디오>(1989~) 같은 프로그램은 영상을 통해 자신을 기록한다는 것이 모두의 일상이 되었음을 확인케 해준다. 이러한 상황은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거쳐, 스마트폰과 각종 액션캠/바디캠/블랙박스 카메라 등의 하드웨어가 개발되고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플랫폼이 등장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개인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 기록의 역사를 길게 나열한 것은, 그것을 재료로 삼는 작업이 점차 많아지기 때문이다. 사적 기록들은 발굴과 발견을 거쳐 영화를 비롯한 무빙-이미지 작업의 재료가 된다. 이러한 재구성을 통해 제작된 작품의 리스트는 필자가 웹진 콜리그에 기고했던 글 [기억의 조건(들)][1]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거의 무한히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모두가 카메라를 소유하게 된 상황에서 기록은 무차별적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글 [기억의 조건(들)]에서 언급한 (국내의 맥락에서) 90~00년대 초반까지의 재발견된 홈비디오 영상들을 사용한 파운드푸티지 작업들부터, 무차별적인 영상 기록의 양면성을 탐구하는 테오 앤서니의 <모든 곳에, 가득한 빛>(2021)까지, 이러한 상황을 드러내고 진단하는 작업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록은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어떠한 형식과 방식을 통해 재료가 되고 가공되는가? [기록과 재구성]이라는 제목을 내세운 씨네미루의 세 번째 상영회는 두 섹션으로 나뉜 여섯 편의 작품을 통해 이를 살펴보려 한다.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기록되지 못한 것들을 기록하기
앙드레 바쟁은 카메라의 자동적인 창조과정이 이미지에 객관성과 신뢰성을 부여하고 시간을 방부처리한다며 영화의 사진적 존재론을 이야기했다.[2] 이러한 주장은 필름에 담긴 이미지가 사물이 기록된 흔적이며, 그 이미지가 실존적으로 사물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카메라를 통해 창출된 이미지는 지표성을 지닌다. 반면 애니메이션은 실사 이미지와 다르게 카메라 앞에 실재했던 대상의 기록이 아닌, 애니메이터가 개입하여 만들어낸 이미지로 구성된 환영이다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지표성을 지니는 대신 도상성 혹은 상징성을 지닌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통해 창조된 이미지는 실제 사물과의 물리적 연결이 없기에 그것의 증언적, 지표적 가치는 하락한다. 때문에 디지털 이미지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디지털 이미지로 제작된 실사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이미지는 모두 가상의 기호라는 점에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러한 포스트 시네마의 상황에서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는 지표성이 강하게 부각되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와 지표성을 전혀 가지지 못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사이의 실험적인 결합으로 규정할 수 있다.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는 실제 대상, 사건, 인물 앞에 카메라가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다큐멘터리가 카메라 앞의 가시적인 대상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는 내면이나 과거의 경험 등 비가시적인 것들의 재현에 목적을 둔다.
이번 상영회의 첫 섹션은 이러한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세 편을 상영한다. 강희진의 <메이•제주•데이>는 제주 4.3 사건 생존자들의 증언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다. 이제는 노인이 된 생존자들은 당시엔 어린 아이였다. 대한민국 현대사 속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 중에서 제주 4.3 사건은 기록이 불충분한 사건에 가깝다. 때문에 생존자들의 증언은 그들의 말을 통해서만, 말을 통해 표현된 기억을 통해서만 증언될 수 있다. 강희진은 생존자들이 당시를 회상하는 그림을 그리게끔 한다. 각기 다른 그림체의 그림들은 감독의 작업을 통해 움직인다. 애니메이션이 된 생존자들의 그림 위로 그들의 증언이 담긴 인터뷰가 이어진다.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생존자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 제주 4.3사건을 기리는 위령제 등을 연달아 보여준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사건 당시로 되돌아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야에 담기는 거의 모든 것을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는 시기는 자신의 증언을 그림으로 그리는 생존자를,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진행하는 위령제를 기록한다. 카메라가 향하지 못하는 과거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재연이 아니다. 사진적 이미지로 존재할 수 없는 기억과 증언을 현재를 담은 영상과 함께 놓기 위해서는, 무빙-이미지가 아닌 생존자들의 그림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사진적 이미지로서의 영화가 운동의 지속을 기록하는 것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것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메이•제주•데이>는 움직임을 부여함으로써 생존자들의 증언을 현재와 만나게끔 한다.
<메이•제주•데이>와 달리, 이오은의 <우리집>은 지극히 사적인 기록이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감독은 한국에 사는 어머니를 자주 만나지 못한다. 어머니는 파킨슨 증후군에 걸리고, 얼마 안 가 요양원에 입소한다. 물리적인 거리는 시차를 만들어낸다. 이 시차는 단순히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시차뿐 아니라, ‘우리집’에 대한 기억의 시차이기도 하다. 딸은 프랑스에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살아간다.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집’에 살고 있다. ‘우리집’에 관한 기억의 분기점이 발생하고, 이는 좁혀지지 않는 시차를 만든다. 영화는 3D모델링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집’과 요양원의 모습, 아이의 모습과 과거 어머니와의 시간이 담긴 드로잉 애니메이션, 그리고 과거에 촬영된 홈비디오 영상을 사용한다. 3D모델링의 차갑고 매끄러운 질감은 ‘우리집’은 물론 어머니가 입소한 요양원의 풍경을 온전히 옮기지 못한다. 차가운 폴리곤 덩어리로 만들어진 아파트 복도 이미지 위로 겹쳐지는 어린 시절의 감독과 어머니의 사진은 이미 벌어진 기억의 시차를 보여주는 이미지다. 동시에 3D로 구현된 요양원 병실 이미지 위로 실제 병실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장면은 지금이라도 그 시차를 좁히고 서로의 기억을 겹쳐 놓고자 하는 정념의 이미지다.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과거가 담긴 홈비디오가 등장하고 영화는 끝난다. 3D로 재현된 공간, 드로잉으로 복제된 과거와 현재의 기억, 종종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사진적 이미지들, <우리집>은 서로 다른 정념을 지닌 이미지를 통해 최선의 추모를 보낸다.
<메이•제주•데이>는 비록 한국 현대사 속 거대한 사건에 대한 증언을 다루지만, 증언은 근본적으로 개인의 기억이다. 과거에 관한 증언이 하나로 엮일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우리집>은 지극히 사적인 추념(追念)을 다룬다. 두 작품이 개인의 기억과 기록을 소재로 한다면, 노영미의 <1021>은 온갖 공적인, 혹은 공개된 기록들의 집합으로서 존재한다. 앞선 두 영화는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띤 논픽션이었다. 반면 <1021>은 픽션이다. <I am not yours, I am you>부터 <파슬리 소녀>, <하녀들>, <KIM>, <ZOO>에 이르는 노영미 감독의 작업들은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들을 잔뜩 끌어온다. 이 이미지들은 이탈리아의 민담이나 그림형제의 동화로 구성되기도 하고, 실제와 조작 사이에서 명멸하는 것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1021>은 노영미 감독이 지난 몇 년간 반복해온 작업의 집대성과도 같다. ‘하이마’와 ‘옥토버’라는 이름을 가진 두 인물의 일대기인 이 이야기는 “'10월 21일' 키워드 검색을 통해 발견된 백 년간의 신문 기사, Wikipedia, SNS 그리고 기타 인터넷 자료”로 만들어졌다. 가령 ‘하이마’는 2016년 일본에 상륙한 태풍의 이름이다. 영화는 1920년 10월 21일의 청산리전투부터 1996년의 성수대교 참사, 2012년의 정의당 창당과 같은 연관 없어 보이는 사건들, 알프레드 노벨, 어슐러 K. 르 귄, 리브 울만, 캐리 피셔, 와타나베 켄, 킴 카다시안 등 10월 21일 출생자들과 잭 케루악, 프랑소와 트뤼포, 엘리엇 스미스 등 10월 21일의 사망자, 10월 21일자 오늘의 운세까지, ‘10월 21일’을 키워드로 한 많은 자료들을 재료로 끌어온다. 이 모든 사건, 인명, 운세, 텍스트와 이미지는 <1021>이라는 픽션으로 재가공된다. 자료들은 무차별적으로 기록되고, 인터넷은 그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서로 관련 없는, 일종의 점묘화로 열화된 이미지들은 두 주인공의 일대기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는 성좌로서 <1021>에 등장한다. 수많은 기록에 접근 가능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것들과 항상 관계 맺고 살 수밖에 없다. 엔드크레딧에 자신의 역할을 “Story Weaver(이야기 방직공)”로 표기한 노영미 감독은, 뒤엉켜 있는 사건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직조해낸다. 흩어져 있는 텍스트와 이미지는 자기 자신을 지시하는 ‘기록’임과 동시에, <1021>이라는 재구성을 통해 기록을 열람하는 이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간다.
사적인 공동의 기록을 말하기, 전규리의 작품들
앞서 살펴본 애니메이티드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개인의 기록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해(<메이•제주•데이>), 사진적 이미지로는 담아낼 수 없는 비-이미지적인 감정의 기록을 이미지화하기 위해(<우리집>), 모두에게 열린 기록을 개인의 미시사로 반대 방향의 확장을 꾀하기 위해(<1021>) 기록을 재가공 했다. 이번 상영회의 두 번째 섹션을 채워줄 전규리 감독의 작품들은 ‘기록’을 사용하는 측면에서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한다. 아쉽게도 이번 상영회에선 상영하지 못하게 된, 전규리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국내 영화제에 소개된 <스윗 골든 키위>는 국경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세 여성이다. 뉴질랜드 키위 농장에서 30년째 일하는 감독의 고모,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온 뒤 그곳에서 만난 연인과 함께 정착할 것인지 고민하는 지인, 그리고 이 영화를 찍기 위해 국경을 넘나드는 감독 자신. 전규리 감독은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의 고모가 수확한 키위는 국경을 넘어 한국으로 가는 데 한 달이 걸리지만, 정작 고모 자신은 한국에 가기 위한 여러 준비를 위해 2년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라 예측한다.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온 지인은 그곳에서 만난 연인과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며 한국에 머무는 경우와 타국에 정착하는 경우 사이의 견적을 내 본다. 키위라는 상품은 자본의 흐름에 발맞춰 국경을 넘나들지만, 국경을 넘나드는 세 여성은 자신이 어느 곳에 속하는지, 혹은 속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언뜻 홈비디오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영화 속 이미지들은 그들의 고민이 사적인 상황에서 출발했음을 지시하지만, 그들의 노동, 기억, 경제적 상황 등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시안) 여성의 몸으로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여행이나 이민과 같은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스윗 골든 키위>의 얼핏 사적인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은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기록을 통해 몸에 접근하는 전규리의 작업은 계속 이어진다. 2019년작 <다신, 태어나, 다시>는 백말띠의 해인 1990년 한국에서 벌어진 선택적 여아 낙태의 생존자인 감독이 역시 백말띠의 해였던 “1930년에 태어났다 일찍 죽은, 1990년에 태어나지 못한, 2050년에 드디어 다시 태어난 여성을 상상”하는 작업이다. 60년 마다 돌아오는 백말띠의 해는, 국가적(동아시아로 범주를 넓힌다면 범-동아시아적)인 미신으로써 여성들을 태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혹은, ‘백말띠’라는 낙인 아닌 낙인을 통해 그렇게 태어난 여성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로 살아오게 하였다. 여성혐오적 미신과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국가차원의 규제(낙태죄)가 교차되는 상황 속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닌 여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다신, 태어나, 다시>는 그것이 교차되는 상황 속에서 이미 태어나버린 자신의 상황을 영어의 현재완료 시제에 빗댄다. “‘태어나지 않음’, (un)borness는 물리적으로 태어났지만, 사회가 원하는 대로는 태어나지 못한 상태에 대한 시적 표현”이라는 연출의도의 문장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중의적인 표현속에서, 미신과 제도 사이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공부하고 작업을 이어나가는 감독 자신의 모습과 함께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이는 활동가들의 모습이 교차된다.
<다신, 태어나, 다시>가 제작된 2019년 한국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 '자기낙태죄'와 형법 제270조 제1항 '의사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영화는 헌법불합치 결정에 환호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1930년, 1990년, 2050년은 각기 다른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닌 계속 진행되는 현재로서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에 수렴된다. 1990년에 태어난 ‘나’의 이야기는 이렇게 ‘백말띠에 태어난, 태어나지 못한, 태어날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다신, 태어나, 다신>과 같은 시기에 작업된 <독수리를 위한 교향곡> 또한 몸 위로 교차하는 국가적 욕망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은 필라델피아 메이시스(Macy’s) 백화점에 있는, 베를린 분리파 예술가인 아우구스트 가울(August Gaul)의 독수리 청동상과 현존하는 작동 가능한 파이프 오르간 가장 거대한 워너메이커(Wannamaker) 오르간을 보여준다. 독일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박람회를 통해 미국 땅에 머물게 된,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독수리의 모습,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과 그것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모습을 중계하는 CCTV 화면은 파이프 오르간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교향곡을 허밍으로 따라하는 소리로 인해 우스꽝스러워진다. 우스꽝스러운 허밍은 백화점 방문자에게 제공되는 거대한 크기와 소리가 주는 모종의 숭고함을 비틀어, 마치 소음처럼 들리게끔 한다. 국가, 국가만큼(적어도 미국 주정부만큼)의 영향력을 지닌 자본은 그들의 육중함을 강조할 형상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세인트루이스 세계 박람회에 출품된 작품을 상품으로서 구매한 뒤 자본의 전당과도 같은 백화점에 전시한 것이다.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위치한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울려퍼지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와 육중한 크기의 독수리상은 그곳을 방문하거나 지나치는 이들의 청각과 시각을 사로잡는 국가 자본주의의 미신과도 같다. <독수리를 위한 교향곡>은 그 미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기록한 뒤 그것을 비틀어버린다.
전규리 감독의 신작 <산증인>은 몸과 국가폭력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올해 10월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진행된 전시 [몸이 선언이 될 때]의 제작지원을 통해 제작된 작품으로, 임신중절, 트랜스젠더 등 몸과 관련된 다양한 상황, 사건, 존재들을 다루는 전시 중 타투에 관한 작품 중 하나로 전시되었다. 이 작품은 1950년대 한국전쟁에서 유엔 사령부에 의해 통제받던 전쟁포로들이 강제로 문신을 새겨야 했던 상황에 대한 것이다. 당시의 전쟁포로들은 강제로 반공문구나 남한의 국기 등을 문신으로 새겼어야 했다. 유교 전통에서 문신은 야만인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렇기에 일종의 형벌로 기능했다. 사극에서 종종 재현되는, 죄인의 몸에 낙인을 찍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몸에 새겨진 글씨(文身)는 지금의 타투(tattoo)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심지어 문맹인 전쟁포로는 자신이 읽을 수도 없는 글씨가 몸에 새겨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산증인>에는 문신을 받자마자 그 살을 도려냈다는 증언도 등장한다. 이 작품은 당시를 기록한 사진과 영상 푸티지, 문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전쟁포로들의 몸에 강제적으로 새겨진 문신은 기록된 이미지 위에 다시금 새겨진다. 문신 이미지는 화면 위에 남은 잔상으로 재구성된다. 전쟁포로에게 문신을 형벌로 내린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이 북한으로 되돌아갔을 때 몸에 새겨진 문구와 그림들로 인해 비난받게 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이들이 북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도록 낙인 찍는 것이다. 당시를 기록한 이미지 속 전쟁포로들의 몸에 그들이 전쟁포로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록으로서 새겨진 문신은, 그들의 몸이 그 자체로 국가적인 폭력의 살-증인(The Flesh-Witness, 작품의 영어제목)임과 동시에 산증인임을 보여준다.
[1] https://colleague.co.kr/forum/view/483428
[2]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 1. 존재론과 언어』, 김태희 역, 퍼플, 2018, 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