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할머니는 음치지만 크게 찬양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저희 외할머니는 28년생이셨습니다. 진안의 염북리라는 산골짜기에서 7남매를 낳고 키우시다가 막내아들이 무려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면서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산골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셨죠. 정말 극과 극의 환경에서도 열심히 교회 다니시며 나중에는 시골보다 서울이 좋다고 하실 정도로 찐 적응자셨어요.
30여 년 전 외할머니집에 대해 생각해 보면 몇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동네 맨 꼭대기 집까지 올라가는데 가는 길이 죄다 소똥으로 뒤덮여서 새 구두를 신고 있던 어린 저에게 꽤 곤란했던 기억과 나무를 떼는 장작냄새와 소죽 끓이는 냄새, 일찍부터 불멍의 맛을 알게 해 준 아궁이 앞에서 죽치고 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요. 명절이면 어린아이들을 창문으로 태울 정도로 빽빽했던 만원 버스에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에 귀를 대고 있어도 차가 지나가지 않는 정말 깊고 깊은 산골이었어요.
수박은 우물에 넣어두고 김치와 반찬은 커다란 나무 아래 난 작은 동굴에 저장을 해뒀습니다. 저 역시 3남매였기 때문에 가끔 아주 가끔이었지만 외할머니집에 맡겨지기도 했는데 어린 맘에 용감하게 집을 나섰지만 밤이 되면 엄마 생각이 나서 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가면 주위가 너무 깜깜하고 추운데 하늘의 별만은 총총히 떠있었던 그 장면이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잊히질 않네요.
외할머니는 아주 작은 키에 시골에서도 항상 파마머리를 유지하는 전형적인 할머니 스타일이셨는데 항상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어요.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길을 걸어 항상 새벽기도를 가셨던 분이셨거든요. 어느 날 예배를 따라갔는데 할머니는 맨 앞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척 앉으시더니 찬송가를 펴셨어요.
저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시며 사람들 손으로 건네어지는 보라색 헌금함에 넣으라고 알려주셨어요. 할머니는 체구에 비해 목소리도 우렁차신데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너무 크게 불러서 찬양시간임에도 저는 웃음을 참느라고 눈을 꼭 감고 기도만 했어요. 웃긴데 웃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에서 더 웃음이 나는 거 아시죠.
목사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아멘도 큰 소리로 하시면 저의 웃음 버튼은 저의 신앙심을 더욱 자극해서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기도하기 시작했더랬죠. 그런 할머니가 저를 보시면 항상 하시는 말씀이 키 크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셨어요. 할머니처럼 엄마도 작은 키인데 저마저 작은 키를 유지하는 걸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러셨을 텐데도 어릴 땐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 역시 기도를 잘 안 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작은 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공이 한식이다 보니 여름방학 때 서울로 실습을 자주 갔어요. 그래서 서울 할머니댁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요. 깡촌에서 사신 할머니가 서울에서 얼마나 큰 부자로 살 수 있었겠어요. 봉천동의 반지하에서 시작하셨던 할머니는 삼촌이 독립하고 나서는 일찍 서울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큰 이모집의 옥탑방에서 꽤 오래 사셨어요. 덕분에 저도 몇 개월씩 더부살이를 할 수 있어서 참 고마운 할머니집이었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할머니는 90세를 바라보는 나이를 향해가고 계셨죠. 약간의 치매기도 나타나셨어요. 여름이면 옷을 세 겹 네 겹 껴입으시고 같은 말을 반복하기는 했지만 크게 이상행동을 하시지는 않아 예쁜 치매라고 하더라고요. 아직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저희 본가에서 몇 주 머무셨는데 그때 돌 지난 우리 딸을 한 번은 보여드리고 싶어서 집에 찾아갔었어요. 할머니는 언제나와 같이 파마머리와 지글지글하지만 밉지 않은 눈가 주름을 지으며 웃고 계셨어요.
코로나로 돌잔치도 간단히 해서 아기를 보여드린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할머니는 자꾸 아들이냐 딸이냐를 몇 번씩이고 질문하셨죠. 할머니 딸이에요. 해도 아들이기를 바라서 그런 건지 계속 같은 질문을 하셨어요. 웃기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성심껏 대답해 드릴 때마다 '금동아 은동아' 하고 아기를 계속 부르시며 웃으시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네요.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엄마가 아빠 병간호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까지 병간호하는 게 마땅찮았었는데 할머니가 소천하시고 나니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죄스러운 마음도 어쩔 수 없네요.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 내 소중한 딸까지 하나의 실로 연결되는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이어지나 봐요.
언제나 씩씩하게 찬양하고 기도했던 할머니의 모습에 이제는 엄마가 겹쳐 보이고 항상 젊을 것만 같았던 저도 이제는 엄마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우리의 나날들이, 유한한 삶의 덧없음을 느끼게 하는 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