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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Sep 06. 2022

인간은 왜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는 걸까

 세 자매 이야기



세 자매가 있다. 그들은 6.25전쟁 때 아버지를 잃었다. 과부가 된 어머니는 딸 셋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다른 남자에게 재가를 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세 자매는 누구보다 서로를 의지하며 보살폈다. 큰 언니가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산골로 시집갈 때 동생들은 따라가며 울었고, 제법 부잣집에 시집간 둘째는 틈만 나면 밭에서 나는 채소며 과일을 한 줌씩 담아 동생 손에 들려주곤 했다. 쌀집에서 주판알을 튕기며 열심히 일하던 막내는 평범한 은행원과 결혼해 일가를 이뤘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집이 없었고, 모두 죽기 살기로 일했다.


50년 후. 가세가 뒤집혔다. 한 푼 두 푼 모아 일수 이자로 돈을 불렸던 큰 언니는 그 돈을 건물에 투자해 몇십 억대 건물주가 되었다. 욕심일랑 하나 없던 둘째는 무능한 남편 덕에 물려받은 재산마저 근근이 처분하며 연금 하나 없는 노년을 맞았다. 젊은 시절 둘째 언니를 따라 강남으로 진입했던 막내는 남편의 은행 대출을 이용해 아파트를 사고 되팔아 몇백억 대 부자가 되었다.


10년 전, 한국전쟁 때 돌아가신 아버지 앞으로 유족연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첫째 언니 덕분이었다. 구청에 다니는 지인이 이걸 여태 몰랐냐며 큰언니에게 귀띔했다. 세 자매 몫으로 한 달에 무려 100만 원 씩이 지급된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을 전해들은 둘째 얼굴엔 잠시 희색이 돌았다. 근근이 살고 있던 둘째에게는  몇십만 원이라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은주야, 큰 이모가 엄마한테 얼마나 줄 거 같아?"

"엄마 생각은 어떤데? 엄마라면 얼마 정도 나눠줄 거 같아?"

"엄마야 그래도 똑같이 나눌 거 같은데... 큰언니니까 조금 더 받는다 치고, 4:3:3 정도. 아님 큰 이모가 어렸을 때 고생 많이 했으니 큰 이모가 반 가져간다 쳐도, 우리한테 나머지 반은 떼어주지 않을까?"

"그렇지. 말이야 그게 맞긴 하지. 엄마가 잘 살 때 이모들한테 얼마나 잘했어~ 뭐만 생기면 바리바리 싸다 주고."

생각지도 않은 용돈을 받게 될 생각에 한껏 들뜬 엄마가 어느 날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한편으론 엄마가 이 일로 상처받지 않기를 기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연금 수령일. 큰 이모가 수령인 1순위인 장남(장녀)의 권한에 따라 100% 전부를 자신의 것이라 선언했을 때 우리는 모두 뜨악했다. 그렇게 큰 이모는 지난 10년간 1억이 넘는 돈을 수령하며 동생들에게 단 한 번의 생색(?)도 내지 않았다.


큰 이모가 연금을 챙겨 먹은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내가 물었던 듯하다.

"근데 엄마, 이 연금 언제까지 나오는 거야? 만약에 장녀가 사망하면 그걸로 끝이야?"

엄마가 알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다음 순위가 타게 되어 있어."

"그럼 엄마네? 우리 할아버지 연금 조금이라도 만져보려면 이제 큰 이모 빨리 죽기를 바라야 하는 거야?"

"하하하..."

그 뜻밖의 진실에 앞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말았는데... 일수 이자로 살아온 큰 이모 주변에서 이런 농담할 사람이 우리뿐이 아니란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살면서 나를 우울하게 만든 리스트 중에 이 세 자매 이야기가 한 11위쯤 된다. 부모 없이 누구보다 다정하고 서로를 살뜰하게 챙기던 자매. 전쟁과 가난이라는 고난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아이를 태에서 받아주며 전우애에 가까운 애정을 나눈 이들도 돈 앞에서는 상식도 신의도 없어진다는 것. 지금 남부럽지 않게 잘살게 된 것으로도 아무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재산 좀 있는 집이라면 부모의 재산을 둘러싸고 이런 더럽고 치사한 눈치 싸움 하나 없는 집이 없다는 사실이, 한동안 또 나를 우울하게 했다.


왜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추해지는 걸까.


인류의 문명이 인간 개개인의 가치의 총합이라면, 개인의 역사도 자신이 쌓아온 경험과 세월만큼 더 좋은 방향으로 진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이제는 어린아이가 인간으로 대접받고, 여자도 투표를 하고,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회가 되지 않았나. 평민 대부분이 영양실조 상태였던 몇 백년 전과 달리 이제 보통 사람도 귀족과 왕족만큼 먹고 사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인간은 왜 나이를 먹을수록 추해지는 걸까.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는 다 어디로 가고?  누군가의 말처럼 문명이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나의 착각일까?


그러고 보니 어느 책에서 질병을 '기능'으로 묘사한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질병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어야 하기 때문에 질병에 걸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누군가의 큰 그림 속 기획인 것처럼 느껴져서 역시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우리는 늙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하기 때문에 늙는 것은 아닐까. 나이들수록 추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끝 조차 없다면, 이 세상이 생지옥처럼 변해버릴 거란 사실을 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인간에게 죽음을 기획해둔 것일지도.  


아하.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구나. 죽음 뒤에 심판이 있고, 그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실을 마주해야 하니까. 그때가 되면 더이상 회피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아침 나를 우울하게 하는 것들을 떠올리며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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