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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Sep 15. 2022

타인의 고통을 응시할 여유

100만 원, 격려받는 느낌



알바비 100만 원이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꽂혔다.


지난봄, 세금신고 내역서를 들고 식탁에 앉아 생각했다. 1년 전에 비해 뭐가 바뀌었나? 한 달 100만 원 x12개월=1200만 원. 분명 적지 않은 돈이었다. 하지만 딱히 바뀐 건 없었다. 카드값이 나간 후에도 얼마쯤 잔고가 남아 있다는 거 정도? (실로 오랜만의 잔고이긴 했다.)


돈이란 얼마나 휘발성 강한 짐승인지, 들어오자마자 나갈 구실부터 생겼다. 그동안 차마 남편에게 받은 돈으론 드릴 수 없었던 친정에 용돈을 좀 부쳐드렸다. 멀리 떨어져 사는 지인 생일에 처음으로 꽃다발을 보내보았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던 책을 사서 보았다. 그리고 아이들 학년이 올라가며 인상된 학원비를 충당하자, 하~남는 게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쯤 떼어 적금 통장을 들었어야지! 두 어머니가 들으시면 또 혀를 쯧쯧 찰 노릇이지만, 100만 원이란 얼마나 애매한 금액인가!

 

정작 돈의 값어치는 뜻밖의 곳에서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내가 남편과 눈을 마주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내가 남편 앞에서 <해방 일지>의 구 씨가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남편과 한 팀이 되어 사춘기 아들 흉을 보고 있었다. 일상의 수많은 컷 중 스쳐가는 짧은 한두 컷이었지만, 우리가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맞벌이하던 시절.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죄인이었다. 퇴근하자마자 어린이집에서 큰 아이를 받아 집에 오면 그때부터 아이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오늘도 하루 종일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 엄마 노릇이냐’며 아이는 반찬 투정을 하고, 옷을 안 갈아입겠다고 보채고, 이제라도 놀아달라며 밤늦게까지 안 자고 버텼다.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지워지지 않는 몇 장면이 있다. 둘째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다른 한 손으론 오줌통을 받쳐 들고 첫째 아이 오줌을 받는 장면이다. 수유와 배설이 동시에 기능하고 있는 내 몸을 보며 ‘아, 나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구나’ 생각했다.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10시가 넘어가면 나는 그만 이대로 둘째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잠들고만 싶었다. 하지만 아직 기운이 펄펄한 첫째 아이는 누운 내 머리 위로 인디언 추장처럼 뛰어다녔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남편의 눈을 쳐다보지 않게 된 것이. 저녁마다 남편을 기다리는 일을 그만두게 되자, 싱글일 때도 몰랐던 외로움이 덜컥 덜컥 밀려들었다. 함께여서 더 외롭다는 말도 그때 알았다. 어느 날 "예비군 훈련에 와서 일찍 들어가니 오늘은 서둘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는데,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의 무심함에 깨끗이 마음 비웠듯, 이제 그의 호의에도 움직여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난 이후에도 남편에 대해 얼어붙은 마음은 계속 그 어디 즈음에서 맴돌고 있었다.


철학자 레비나스에 의하면 인간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한다는 건, 서로의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응시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수반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간다. 하지만 맞벌이 시절.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고통을 외면했고, 윤리적 책임을 저버렸다. 그러니 내가 다시 남편의 눈을 쳐다보게 되었다는 건, 무언가 조금 녹아내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그의 고통을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노동시장에 나와보니 여전히 이곳은 정글이었다. 다 합쳐봐야 몇 명 되지 않은 작은 학원, 고작 하루 4시간, 특별히 다를 바 없는 수업과 일상 속에서도 크고 작은 경쟁구도가 존재했다. 내가 밥값을 잘 해내고 있는지에 대한 셀프 검열부터 학생들로부터 받는 피드백에 이르기까지, 실로 오랜만의 평가였다.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지만, 오가는 그 짧은 차 안에서도 스스로를 격려하며 다짐하는 응원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보고 시중드는 일은 고된 일이었지만, 그래도 아프면 집에 널브러져 쉴 수 있었다. 내가 하루쯤 빨래를 미루고, 밥을 사 먹고, 아이에게 소홀히 한들 아무도 나에게 눈치 주지 않았다. 나는 집안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20년 가까이 날이 좋건 기분이 내키건 말건 상관없이,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출근을 했다. 똑같은 보고서를 쓰고, 경쟁사 동향을 파악하고, 다음 분기 매출 계획을 세우고, 부서관 업무를 조율하고, 배배 꼬인 CS를 처리했다. 연말엔 다시 내년에 무얼 할지 스스로를 옭아맬 예산을 세웠다. 위와 아래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끊임없이 평가받는 그 자리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한 달 100만 원은 청년 기본소득에 대한 나의 인식도 바꾸어 놓았다. 어떤 사회심리학자의 말처럼, 어쩌다 만난 친척 어른이 나에게 기분 좋게 용돈 한번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해주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애썼다고, 빠듯한 생활비로 먹고 사느라 고생이 많다고. 이걸로 사고 싶은 책 맘껏 사보라고. 명품백에 한정판 스니커즈도 아닌데, 이 정도 지적 허영심쯤 허용해도 괜찮다고. 어떤 이들에게는 부모의 지위와 재산이 이미 든든한 뒷배가 되기도 하는데... 그 정도의 지원과 격려쯤 나라에서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친절함이 누군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는 마술을 부릴지 누가 알겠는가!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누군가로부터 격려받고 있다는 느낌. 단돈 100만 원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다.



- '어떤 사회심리학자'는 아마도 '심리연구소 함께'의 김태형 소장이었던 듯싶다. 몇 년 전 그의 책과 유튜브를 경청했는데, 어떤 것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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