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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12. 2022

훈련이란 걸 시킬 줄 알았지

 결국 내 방식대로 가장 편한대로



나란 인간은 타고나길 규칙, 당위, 바운더리에 미약하다.  잠깐. 규칙, 당위, 바운더리라는 건 다 후천적인 거 아니야? '타고나길'이라니?  다시 써보자. '규칙'에 대해서라면 타고난 자유분방한 기질이 양육과 훈련으로 보완되지 못한 것 같고, '당위'에 대해서라면 한때의 치기 어린 반항심이 부모와 교회와 시댁이라는 경험치를 통해 강화된 덕분에 느슨해진 게 맞겠다. 나머지가 '바운더리'인데, 이게 좀 복잡하다. 일단 자존감 낮은 사람 특유의, 바운더리가 희미하다. 지금은 그나마 가부장적 환경 하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넘나들며 선 긋기를 연습하는 중이랄까.    


한마디로 좀 제멋대로 살았다. (이 말하기가 어려웠군).


그러다 보니 애 키울 때도 맨날 산이며 바다며 놀이터에 풀어놓고 키웠다. 모두 성적과 입시라는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방식이 싫어서이기도 했고, 인생의 목표 같은 건 애초에 내게 없는 단어였다. 누군가 내게 인생의 목표라는 항목에 꼭 무언가를 써넣어야 한다고 펜을 쥐어주면 그때 역시 나는 '자유'라고 쓸 게 뻔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 강아지가 들어왔을 때 훈련이란 걸 시킨다면, 그건 당연히 내가 아니라 남편 몫일 거란 예상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남편은 매사 목표를 두고 철저한 계획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하는 인간 기계. (게다가 너는 군대까지 다녀온 군필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기대는 예외 없이 비껴갔다. 우리 집에 훈련이란 없었다.


피치야, 손! (그게 뭐예요?)

피치야, 앉아! (해줄까 말까)

피치야, 엎드려! (뭐라고요오? 안들려요오오~)

빵! (아, 귀찮은 인간!)


그러다... 지친 인간이 한숨을 한번 푹 쉬고 터덜터덜 냉장고로 다가가 부스럭거리며 간식 꺼내는 시늉을 하자마자, 인간 말종처럼 심드렁했던 개는 어디로 사라지고 세상 천재견이 정자세를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야시시하게 내리깔고 꼬리는 바닥을 슬슬 훑으며. 내가 피치야, 하고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앉자, 엎드려, 빵"을 초고속으로 치른 뒤 배를 깔고 할딱 거린다.   


아들도 이렇게 키웠다. 규칙도 당위도 바운더리도, 훈련도 없이. 그땐 내가 입시와 점수와 경쟁으로 과열된 대한민국 교육에 대해 반발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며 알았다. 사실은 내 기질대로 키웠다는 걸. 그 방식이 내 자유로운 기질에 맞아서. 그게 내게 가장 익숙하고 편한 방식이기에. 균형을 주지 못했다는 걸.


다행히 우리 집 개는 아파트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웬만한 일로 짖지 않았고, 배변 훈련도 정해진 곳에 잘 가려서 했다. 좋은 기질의 아이였다. 하지만 1년쯤 지나고 우리가 어디 애견 페어에 다녀와 배변판을 다른 걸로 갈아주자마자 문제가 시작되었다. 바뀐 배변판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무 데나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한번 길을 잃자, 예전 배변판으로 다시 바꿔주었는데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배변판에 오줌을 묻히고 재차 새로운 방식에 도전해 보았지만, 훈련에 익숙하지 못한 건 사람이나 개나 똑같았다. 작심삼일 만에 우리는 개에게 소리를 지르고 다시 이 방식 저 방식으로 도전하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들 사춘기도 우리는 딱 그런 방식으로 치르고 있었다. 아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전에 컴퓨터 앞에 앉는 것도, 규칙을 정해 놓고 시간을 배분해 쓰지 않는 것도, 끝내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다 내가 허용한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내내 공부하다 들어온 아들에게 숙제부터 하고 TV 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 또한 촉각을 다투며 살지 않았기에 아들이 시간관념이 투미해도 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무언가 특별히 이루기 위해 달려간 본 적이 없었기에, 장래 희망 따위 천천히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춘기를 호되게 치르며 돌아보니 모두 다 내가 나 편한대로 한 것들이었다. 아들이 내가 차린 밥을 쉽게 거절하는 것도, 내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먹고 입는 자잘한 수고 하나에도 누군가의 수고가 스며 있음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니 네가 그렇게 쉽게 마다하면 안된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 서운해도 참아야 하는 줄 알았고, 그렇게 가정 내에서 그림자처럼 헌신하는 게 엄마의 자리라고 생각하고 티 내지 않았다. 내 어머니가 그랬기에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 모두가 생색내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사춘기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 내가 어느 날부터 아들의 눈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닫고 그 자리에서 펑펑 오열했다. 그건, 내가 맞벌이하던 당시 남편을 설득하지 못해 끝내 그를 저버린 방식이었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아들에게로 그짓을 대물림을 하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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