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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17. 2022

엄마, 이건 어부바하는 거야

아들과 개의 공통점(10) - 댕댕이가 낮에 꿀잠 자는 이유


구씨 : 웬만하면 서울 들어가 살아. 평범하게. 사람들 틈에서.
미정 : 지금도 평범해. 지겹게 평범해.
구씨 :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그럴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너네 오빠 말처럼, 끌어야 하는 유모차가 있는 여자들처럼.
미정 : 애는 업을 거야. 당신을 업고 싶어. 한 살짜리 당신을 업고 싶어.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의 수많은 명장면 중에서도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구 씨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돌연 이별을 선포하자, 역시 이번에도 염미정은 왜인지 묻지 않는다. 어떤 위로도 충고도 없이, 그저 추앙만 보내기로 했던 첫 약속처럼. 구 씨는 차라리 미정이 자신에게 욕이라도 퍼부어주었으면 좋겠지만, 미정은 끝까지 화가 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서운하고 애틋한 마음을 가장 거친 언성으로 표현한 것이 '애는 업을 거야'라는 말 속에 들어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큰 소리 한번 치지 못했던, 지겹도록 바보 같고 평범한 여자를 결코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이 마법의 말. 남들이 다 그렇고 그런 유모차의 욕망을 향해 내달릴 때, 자신의 욕망은 그들과 같지 않다는 걸 알며 살아갈 정도만큼 그녀는 특별하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구 씨를 알코올 중독과 호빠 생활에서 곧 구원해 낼 터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가장 좋았던 건, 더 이상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 떠밀고 울부짖는 아이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도망치듯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TV 앞에 앉아 도라에몽에 심취한 아이는 행복하다. 유치원 차가 올 때까지 나는 아이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눈앞에 아침 햇살을 받아 발 그래진 아이 발가락 열 개가 보인다. 도~레미~도 미, 도, 미... 도레미송을 부르며 앙증맞은 그것들을 마음껏 희롱한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등에 업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또 얼마나 행복하던지! 살포시 잠이 든 아이가 내 품에 꼭 안긴다. 아이의 작은 숨이 오르락 내린다. 나는 아이를 업고 계절의 변화가 선명한 뒷길을 일부러 크게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 네 곁에 있어줄게. 다신 등 떠밀지 않을게. 내 등에 매달린 어린것의 온기는 따듯하다.


집에 돌아와 잠에 취한 아이를 눕히고, 그 옆에 잠시 같이 몸을 말고 눕는다.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시간. 말간 얼굴이 노곤해진 오후 햇살 아래 노랗게 물들었다. 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어여쁘기만 한 너의 눈, 코, 입. 하나, 둘 훑어 내려가다 보면 뒤척이던 아이가 이내 몸을 틀어 저 편한 자세로 돌아눕는다. 엄마의 투정이 시작된다.


"에이, OO야, 엄마 싫어? 우웅 우웅, 돌아누우면 엄마 삐친다~~"   

아이는 잠결에도 미안했던지 이렇게 얼버무린다.

"아니야... 엄마..... 이거 어부바야. 내가 엄마 어부바~~~ 해주는 거야."

세상에나. 다섯 살배기가 어떻게 이런 말을...! 나는 어린것의 그 말에 경탄하며 다시 팔을 둥글게 말아 아이를 안는다. 아니, 아이에게 업힌다. 아이의 뒤통수에 얼굴을 비빈다. 내가 기억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유년의 결핍이 충족된다.  


그런 아이 얼굴에 어느 순간부터 붉은 여드름이 하나 둘 올라오고, 다리에 털이 숭숭 나고, 정수리에 남자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밥 먹는 모습을 3초 이상 쳐다보면, 바로 찌릿, 하고 반격의 눈빛이 날아왔다. "조금만 더 먹어~"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엄마는 뚱뚱해서 좋아?"라는 소리 들어야 했다. 어느 날은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 아들에게 작심하고 열변(!)을 토했다.   


"OO아. 너어, 이렇게 어, 자꾸 식탁에서 핸드폰만 보고, 밥 먹을 때 말고는 얼굴 볼 일도 없는데 엄마가 뭐 좀 물어보면 귀찮아하고... 어, 자꾸 그러면 어, 너 나중에 결혼하고 어, 네 색시랑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

(색시랑 뭘 어떻게 한다니?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게냐, 엄마야~ 말은 또 왜 이렇게 버벅거리고! 쯧쯧...)    

하지만 역시 호기로운 내 아들! 개떡 같은 엄마 말을 어찌나 찰떡 같이 잘 알아먹고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그때 가서 그 여자랑 내가 알아서 잘할게요. (그러니 엄마 너는 그만 신경 끄셔도 됩니다)"


이렇게 매정한 아들이 학교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게, 강아지 허그다. 하루 종일 반쯤 잠에 취해 자기 방석에 누워 햇빛을 쬐는 게 전부인 저 녀석이 뭐가 이쁘다고, 배낭 내려놓자마자 가장 먼저 댕댕이에게 달려간다. 녀석의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때론 녀석을 잠시 안은 채 바깥세상에서 묻혀 온 온갖 시름을 털어낸다. 그럼 그런 아들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질투심에 활활 불타오르며 이렇게 소리 지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저 댕댕이 때문이야~~~. 저 이쁜 것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우리 집 남자들을 모두 홀려, 내가 받아야 할 사랑을 모두 가로챘다고~~~' (참고로, 우리집 댕댕이는 수컷입니다. ^^: )


질투심에 불타는 밤이면, 녀석은 나와 함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발버둥 치는 녀석을 덜렁 들어 내 침대 왼편에 앉힌 뒤 나와 같은 벽을 바라보게 하고는 그대로 털퍼덕 쓰러트린다. 녀석의 정수리 털이 바로 내 코 앞에서 몽실거린다. 그 부드러운 정수리에 얼굴을 처박고 팔을 뻗어 백허그를 한다. 벽 쪽으로 뻗친 녀석의 긴 다리와 발이 딱 손에 잡힌다. 내 손이 발에 닿자마자 녀석의 희미한 저항이 시작된다. 나는 발을 더욱 세게 잡고는 사냥 아니 산책으로 거칠기 이를 데 없는 다섯 개의 까만 쿠션들을 마구 주물럭거리며 녀석을 희롱한다. 그리고 마침내 쿠션들 한가운데 - 이곳만큼은 냥젤리만큼 부드럽다 -에 내 검지 하나를 쏘옥 밀어 넣는다. 물고기 시절 물갈퀴의 흔적이 부채처럼 남은 그곳은 검지 손가락 하나를 넣으면, 딱 알맞을 정도의 크기다. 하얀 털이 일렁이는 정수리에 얼굴을 박고 댕젤리를 희롱하다가 진화의 흔적 한가운데 검지 손가락을 말아넣으면 비로소 내 질투심은 조금 누그러들기 시작한다.


이상한 점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분명 어젯밤 함께 잠든 댕댕이가 늘 다른 방에서 기어 나온다는 것이다. 피치야~라고 부르면, 아들 방이나 남편의 침대에서 약간 충혈된 눈을 한 댕댕이가 얕은 한숨을 쉬며 챙챙챙, 걸어 나온다. 어젯밤도 이 방 저 방 외로운 손님들이 너를 붙잡아둔 것이 분명했다. 밤새 백허그와 물갈퀴 테러를 당하며 너도 조금은 피곤한 밤을 보냈겠다 싶었다.


아하, 그래서 네가 낮에 그리 꿀잠을 자는 것이었고나.   


p.s. 미정 씨. 아기는 꼭 업어서 키우세요. 그 아기 다리에 털어 숭숭 올라오기 시작하면, 강아지를 들이세요. 당신의 욕망이 충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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