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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3. 2022

아들과 나는 한몸이었는데

이해 못 한 채 공감하기



"그러니까 아이가 외롭다고 하죠!"

육아 선배 아니 후배 아니 10년 차 베테랑 상담사의 반격이 바로 시작되었다.


"내가 뭘? 내 눈에 아무렇지도 않은 걸 그럼 어떡해? 거짓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공감하는 척?"

"공감하라는 게 꼭 아이와 똑같은 감정이나 생각을 가지라는 게 아니잖아요. 너는 그게 거슬리는구나, 그래서 참 힘들겠다, 하고 그 감정을 인정해 주라는 거죠. 선배까지 같은 감정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아니라면서 그 아이 감정까지 이상한 것으로 낙인찍을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역시 친절한 상담사의 모범 매뉴얼은 다음과 같습니다)

엄마가 너와 똑같은 감정이 아니라 서운하겠지만, 엄마 눈에는 솔직히 괜찮아 보이거든? 엄마는 너랑 다른 사람이니까 다른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네가 불편한 건 충분히 알겠어. 그러니까 이렇게 괴로워하는 거겠지. 그렇지? 네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축구공인데, 네 마음에 흡족한 공이 아니라서 엄마도 마음이 참 안 좋아.


모르는 단어도 특별한 단어도 하나 없었다. 그런데 거짓말도 아니면서, 심지어 교훈적이기도 한 것이, 또 희한한 방식으로 '엄마는 네 편'이라는 공감을 하고 있었다. '내 눈엔 멀쩡해 보이거든?'이 '엄마와 기준이 같진 않지만 네가 이상한 건 아니야'로 바뀌어 있었다. '넌 왜 맨날 아무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난리법석이니'가 '네겐 불편하니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겠지'로 공감하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예민해서 엄마는 불안해 죽겠다'가 '네 마음이 안 좋으니 엄마도 마음이 안 좋다'로 순화되어 있었다.


아무런 가치판단도,  옳고 너는 그르다고 찍어내리지도, 엄마의 불안을 아이에게 떠넘기지도 않았다. 정말 묘했다.


'공감'에 대해서라면 학부모 교육에서 백만 번도 더 들었다. '공감'은 타인에 대한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주라고. 그 말 어디에도 상대방을 똑같이 이해해야 한다거나, 상대방과 똑같은 감정이어야 한다는 전제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공감한다는 말속에 '똑같음'을 전제로 하고 있었을까. 이해하지 못한 채 공감할 순 없다고 당연히 생각했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공감하는 것, 그것은 공감하는 척하는 것이고, 내 감정을 속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남편과 살면서 나는 타인과 내가 하나 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타인은 늘 내 이해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아이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왜였을까.


아이를 타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남편과 달리 아들과 나는 시작부터 한 몸이었다. 어떻게 아들과 내가 남일 수 있을까. 나는 아들의 엥~ 하는 소리 하나에도 배가 고프다는 건지, 기저귀가 축축하다는 건지, 놀아달라는 건지 알았다. 아니 알게 되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의 몸 구석구석 점 하나 흉터 하나에 얽힌 사연까지 다 알았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과 놀이와 색깔과 계절과 친구를 알았다. 호불호를 표현할 때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표정을 알았다. 아플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모든 순간을 함께 하며 알게 되었다. 엄마라면 아들에 대해 모를 수 없었고, 그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내 모든 걸 갈아 넣어 너를 만들었으니까.    


당연히 나는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점점 남이 되고 있었다. 사춘기를 코 앞에 둔  그 아이의 모든 행동이 내게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도서관 서가에서 '아들'과 '사춘기'를 교집합으로 한 책들을 모조리 빌려 왔다. 아들의 특성, 사춘기 몸과 마음의 변화, 부모의 양육 태도를 분석하고 지도하는 책까지. 아니, 꼭 그걸 키워드로 할 필요도 없었다. 고전 소설 속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면서도, 최신 뇌과학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모든 문장이 부모와 아들 간 본성과 양육의 문제로 읽혔다.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모든 이야기 속에 아들과 내가 있었다. 아이들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형편 없던 시절부터 황태자처럼 떠받들고 살게 된 오늘날까지,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우리가 속한 사회와 문화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해 왔다. 이상한 아이가 꼭 부모 때문이라는 낙인은 부당하지만, 이상한 부모는 아래 자란 아이가 이상하게 자랄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기록은 수많은 책과 매체와 주변 선배 엄마들의 양육 경험을 통과하며 내린 결론이다. 2018년 부터 오늘까지. 첫째 아이 6학년 때부터 고3까지. 대한민국을 사는 부모라면 모두 겪게 마련인 아들의 게임, 핸드폰, 라면 중독의 문제, 그리고 공부와 진로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담았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아들' 때문에 시작한 고민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 나는 이 세상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어떤 부분 아들의 부족분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자유하지 못하다.  


아들 사춘기는 곧 나의 양육 태도를 점검하는 시간이었으며, 그 동안 굳이 대면할 필요 없었던 나의 내면과 만나고 깨지는 시간이었다. 아들과 독립하는 시간이자 중년의 어두운 밤, 신 앞에 다시 단독자로 서야 하는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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