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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28. 2022

아들이 라면을 먹기 시작할 때

엄마는 얼마나 상심하는 게 적당할까



그래서, 사춘기 아들이 얼마나 이상하길래?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먼저 조던 피터슨의 이런 말로 되물어야 할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몸이 개운하지 않을 때 나는 어느 정도로 상심하는 게 적당할까.

파티에서 내 농담이 통하지 않을 때. 내가 얼마나 괴짜인지에 대한 오류의 규모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명제의 꼬리만 남겨놓고 나머지를 사춘기 아들로 바꿔 넣어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가능하다.  


사춘기 아들이 밥을 제때 먹지 않고, 잠을 제때 자지 않고,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을 때 엄마는 어디까지 상심하는 게 적당할까.

이 아들의 문제가 사춘기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원래 예민한 기질 탓인지, 엄마 때문에 강화된 것인지, 그 오류의 규모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사춘기 아들은 언제부턴가 내가 차려준 밥을 거부하고 라면 나부랭이를 먹기 시작했다. (네네, 열받은 거 맞습니다)

그 깨끗하던 애가 씻지 않고 교복을 입은 채 잠드는 날이 반복됐다. (미친 게 분명하죠?) 

집에만 오면 핸드폰과 게임과 한몸이다. (사춘기 애들 있는 집이 대부분 이러고 이젠 별스럽지도 않죠)

학교 성적은 떨어지는데, 학교 가는 건 재밌단다. (학교 밥이 참 맛있답니다. 급식충입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혹 생각하실 분이 계실까 하여, 사춘기 아들의 광폭한 행보가 시작됐을 때, 역시 나의 인생 배 아니 배 아니 10년 내공의 테랑 상담사(이하. 선후베)가 내게 한 충고를 옮겨 본다. 


절대 허용하면 안 되는 것 세 가지가 있어요.
건강을 해치는 행동.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 위험한 행동. 이건 꼭 지키게 해야 해요.


이 얼마나 명확하고도 애매모호한 기준인가. 엄마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내 아들이 밥을 먹지 않아요'라고 했을 때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기준들이 '스펙트럼 하고' 있는지? 매일 아침 꼬박꼬박 잘 먹고 다니던 애가 갑자기 아침밥을 안 먹고 다니게 됐다는 건지, 하루 두 세 그릇 먹던 애가 입맛이 떨어져 한 그릇밖에 안 먹게 됐다는 건지, 최대한 사수하던 라면을 하루에 한 번 이상 먹게 되었다는 건지, 먹긴 먹는데 차려놨을 때 맞춰 나와 먹지 않고 자기 먹고 싶은 때 먹게 되었다는 건지. 


라면의 먹는 아들에 대입해 보자. 사춘기 아들이 얼마나 라면을 많이 먹어야 건강을 해치는 행동일까. 하루에 한번? 아님 두번? 몇달을 계속 질리지도 않게 먹을 때?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의 기준은 또 어떤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아무 문제가 없으면 괜찮은 걸까? 집에서 기본 생활 습관이 다 무너져 내려서 엄마 속을 긁어놓더라도? 어느 정도가 엄마가 사생결단해서 고쳐야 하는 '문제 행동'이며, 아니면 사춘기가 지나면 다 괜찮아 지는 행동일까? 만약 아들이 서너 달을 계속 라면을 입에 달고 사는 행동이 '건강을 해치는 행동'이라고 판단될 때, 엄마인 나는 아들을 얼마나 붙들고 닦달했어야 옳았던 걸까. 언제 내가 사생결단하고 개입했어야 사소한 순간은 문제행동이라는 결정적 순간이 되지 않았던 걸까. 


아들에게 하루에 라면을 한 끼 이상 먹지 못하게 했으나 어느 날 두 끼 이상을 먹게 될 때? 두 끼 이상을 먹게 되던 날이 2-3일이 넘자 한두 마디 잔소리를 시작하고 그게 몇 주 계속되자 그게 왜 네 건강을 해치는지를 설명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때? 아들과 대면하고 앉아 '네가 이런 행동을 계속할 경우 지금은 젊어서 모르겠지만 나이들면 고생 어쩌고~으로 시작되는 장황설을 이성적으로 늘어놓고, 또 어떤 때는 정성껏 차린 음식을 거절하는 것이 엄마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를 감성적으로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나자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할 때? 가슴에 참을 인자를 세 번쯤 새기고 이 이성과 감성과 불안과 잔소린가 섞인 매뉴얼을 세 번쯤 반복했을 때? 그런데 여전히 아들이 귀를  닫고 그런 행동을 반복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렇게 부글거리다가는 어느 날 미치고 팔딱 뛸 거 같아서 주변 엄마들에게 아들의 만행을 고발했을 때, "언니, 내 친구네 집은 엄마가 라면을 못 먹게 했더니 어느 날 책상 서랍 치우다가 컵라면 먹다 남은 걸 발견했대" 라거나, "지난번 내 친구 만났는데 그 문제로 아들이랑 싸우다가 아들이 방문을 잠갔나 봐. 문고리 잡고 방문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손목이 나가서 깁스를 하고 왔더라고"라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상대적으로 덜 미친 내 아들과 우리 관계에 안심하고 몇 발 뒤로 물러났는데... 그게 나의 결정적인 실수였을까.  


'라면도 먹다 보면 질리는 날이 올 거다'는 옛 성인의 초탈인지 자포자기한 심정인지 모를 나사 빠진 모양새를 하고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라면은 게임과 똑같았다. 아이가 로블록스에 질릴 때쯤 오버워치가 나오고, 오버워치가 질릴 때쯤엔 또 다른 게임이 끝도 없이 출시되어 내 아이의 시선을 사로 잡듯, 라면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NO는 사춘기 아들에게 어느 것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라면에 밀리고, 게임 핸드폰에 밀려 점차 아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조던 피터슨의 이런 말 : 분명 조던 피터슨의 어느 글인지 강연에서 보았는데, 어딘지 출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조던  피터슨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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