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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Oct 30. 2022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지 않는다

SNS에 라이킷을 누르며 자란다



독서모임 7년 차 개근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부모가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아이도 책을 좋아하게 된다, 는 말에 반대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지 않는다. 또래 친구들을 보며 자란다. SNS에 라이킷을 누르며 자란다. 꼭 지금의 우리처럼.


이상하게도 부모의 뒷모습에 대한 예화를 생각해내려고 애쓰는 중에 이 장면이 떠올랐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그때 그 시절, 이 집안 남자들의 '집안일 지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이 한 장면이.


마루에서 내가 걸레질을 하고 있잖아. 그럼 거실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남자들이 내가 지나갈 때마다 일제히 다리를 번쩍 드는 거야. 그럼 난 거길 기어들어가 걸레를 훔치고 훔치고...


그다음 '...' 에는 무슨 말이 들어갈까. 그렇다. 그거 한번 손에서 낚아 채 대신 마룻바닥 한번 닦아주는 남자가 없더라, 다.


다 지나간 일이고, 그렇지 않은 집을 찾아보기 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관습적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어머니는 부잣집 막내딸로 어렸을 때 아버지와 겸상을 할 정도로 귀하게 자라셨다. 그러니 실향민이자 가난한 집 장남인 아버님을 만나 결혼하고, 떡두꺼비 같은 아들 둘을 낳고 매일 기저귀를 삶고 5대 영양소에 맞춘 이유식을 정성껏 만들어 먹이는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존경받는 선생님이었던 아버님은 늘 학교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머니는 매일 밤 아이를 업고 마당에 나가 달을 쳐다보며 이렇게 다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만 좀 키워놓고 나면 죽어버려야겠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산후 우울증이 분명해 보이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병명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그것. 지금도 내 몸을 반으로 나눠놓으면 딱 알맞을 정도로 가늘고 여린 어머니. 그 작은 몸이 하루 종일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 동안 번쩍 올라간 다리 여섯 개를 상상해 본다. 365일을 매일같이 어머니가 발밑에 기어들어가는 동안 한번도 대신 일어나 걸레를 잡지 않았던 그 무사유한 다리 여섯 개를.


아들에게 핸드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후 내 불안을 충동한 것은 '한나 아렌트'였다. 지금은 이미 여러 매체에서 다뤄져 익숙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그의 뇌를 한마디로 명명한다면 바로 이 '순전한 무사유'가 아닐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전범 문제를 국제적으로 막 논의하던 시기.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는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지내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잡아다가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다. 사람들은 몇 백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장본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모두 TV 앞에 둘러앉았고. 한나 아렌트는 그때 미국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그 재판을 참관했다.


세기의 재판이었다. 한나 아렌트도 처음엔 그처럼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재판 과정을 지켜보는 내내 그녀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었다. 평범한 외모에 구부정하니 고개를 갸웃한 채 법정에 서서 담담히 자신을 변호하던 아이히만은 너무나 평범한 독일인에 불과했던 거다. 마침내 그의 죄명을 낱낱이 명해 가던 재판관이 그에게 유태인 학살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저 상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다."라고. 부하직원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건 누구나 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자기는 그저 명령에 따른 죄 밖에 없다고 말했다. 되려 상관의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기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했을 거라고.


거기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나왔다. 그의 죄명은 자기가 행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하지 않은 죄’라는 것. 한 인간이 악마가 되기 위한 조건은 이처럼 아주 평범할 수도 있다는 것. 그저 생각하지 않은 죄-‘사유 불능’이 평범한 인간을 악마로 만들 수 있다는 철학적 개념이 거기서 도출됐다.


사춘기 아들과 대화하며 내가 가장 헷갈리는 지점도 이것이다. 이 아이가 아직 철이 덜 들어 이러는 걸까. 아님, 핸드폰이 이 녀석을 사유 불능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걸까. 그걸 모르겠다는 거다. 가령, 한동안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10억 주면 감옥에 들어갈래?" 같은 질문 따위를 던졌을 때. 내 아들이 "응"이라고 대답하면 나는 어느 정도 상심하는 게 맞는지, 다시 갈팡질팡 하고야 마는 것이다. 내가 불안을 감춘 채 정색을 하며 감옥살이의 지난함에 대해 설명하면 이 녀석은 "엄마는 내가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라고 분명 나를 꼰대 취급할 게 분명했다.


어느 날은 아이가 흥분하며 말했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유튜버가 실시간 채팅에서 자기 이름을 언급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유튜버가 "내일 지구가 망하면 무얼 할래?"라고 던진 질문에 자기가 답했는데, 그걸 그 유튜버가 라이킷 해서 읽어주었다고 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나는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파충류의 뇌를 간신히 부여잡고 물었다. 아들의 대답은 - 너무 뻔해서 이곳에 적기조차 민망하지만- 여하튼 다음과 같았다.


"아빠 차키를 훔쳐서 도로를 질주하겠다."


(하~. 사춘기 아들을 두신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하시나요? 대응 매뉴얼 하나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생각해 보면 아들도 무슨 말만 하면 정색을 하는 부모가 어지간히 답답하기도 할 것 같다. 그래서 식탁에서도, 차 안에서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한결같이 그렇게 핸드폰 붙들고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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