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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6. 2022

사춘기 아들 둔 엄마들만 아는 이야기

사춘기 아들의 핸드폰은 어떻게 무기가 되었나

우연히 파일 정리를 하다가, 사춘기가 극에 달하던 시절 일기장을 찾았습니다. 말끔하게 정리된 듯한 지금의 모습 뒤에 이런 지지리 궁상이~ㅎㅎ. 치부를 드러내어 제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만은, 내가 그래도 그 시절 분투했구나 싶어 읽으며 스스로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막막하던 그 시절, 토로하듯 쓴 글입니다. 매우 긴 글이니 지금 극심한 아들 사춘기를 겪는 엄마들만 읽으시는 게 정신건강에 여러모로... 쿨럭.

(주의. B급 하드고어에 가까운 막말이 오갈 수 있음)



사모님... 조언 부탁드립니다.


대외적으로는 아이와 무던하게 거리 두며 지내는 듯 말하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일로 투닥거리며 지내는 중입니다. 내버려 두라는 말이 이 정도의 간섭도 없이 남처럼 지내란 말은 아니겠거니, 하면서요.


크게는 계속 아들과 이별하는 훈련 중인 거고요. “인격적으로 대하라, 져줘야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 자율을 중시해라”는 세 가지 대전제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연약한 인간이다 보니, 감정을 건드려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하는 어리석음을 계속 반복하는 중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를 앞두고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게 한판 붙는 바람에 수련회를 못 가는 최악의 결과를 빚게 되었어요.


발단은 핸드폰이었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얘기 시작할 때에는 핸드폰에서 눈 떼라”는 요구에 아이가 여러 차례 무신경하게 대응했고, 그래서 화가 난 제가 아이와 오픈 채팅을 하면서 게임을 사사하고 있던 아이 친구를 향해 몇 마디 나쁘게 평하는 말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곤 핸드폰을 압수했죠. 친구와 핸드폰이 전부인 사춘기 남자아이에게 가장 최악의 방법을 제가 써버린 거예요.   


이게 참 웃긴 게, 아이를 잘 견디다가도 한 번씩 크게 터뜨리는 건 제가 뭔가 열심히 하고 난 직후라는 겁니다. 몇 달째 아이와 아빠는 대립 중이라 말을 섞지 않고 있거든요. 아빠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맞춰주지 않음으로써 불편함을 느끼고 스스로 부모에게 숙이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중이에요. 제가 해석하기에 그건 아이와 기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의미 같았어요.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핸드폰과 게임으로 점철되는 아이의 시간을 뺏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줘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뮤지컬을 보여주고, 가족 모임에 데려가 용돈을 받고, 아이가 좋아하는 건담을 사주고... 그러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에 모든 시선을 꽂고 보내는 아이의 시간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는. 그래서 아빠 눈치 봐가며 한 달 남짓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맞춰주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캠핑을 다녀오던 지난주까지, 아이 컨디션도 최상이었답니다. 저도 다시 작은 희망이 생겼고요. 캠핑 가서 아이가 친구들과 블리자드 게임 대회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도, 경험이 될 거니 열심히 하라고. 단, 주중에 피시방 가지 않는 약속을 지금처럼 지키고, 평상시 눈치껏 좀 해라,라고 다짐도 시켰지요. 아이도 기분이 좋았는지 앞으로 설거지도 도와주겠다는 둥 우리 싸우지 말고 잘해보자고 서로 훈훈하게 돌아오던 길이었어요.


캠핑 다녀오고 3일째 되던 날. 그날 같이 영화를 보고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아이가 습관대로 침대에 모로 누워 핸드폰을 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마디 했어요. 언제까지 할 거니? 사실 애들 스스로 질리게 할 때까지 잔소리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죠. 늘 그게 빌미로 싸움이 되니깐요. 하지만 저는 달라요. 핸드폰 하는 걸 며칠 방치해 본 적도 있었지만, 부모가 제재하기 전까지 스스로 그만두는 애들이 어디 있나요. 저는 엄마의 잔소리가 어느 정돈 필요하다는 입장이에요. 암튼, 그리곤 저는 쓰레기를 버리러 갔어요. 다녀왔는데도 애가 여전히 같은 자세로 누워있더군요. 그래서 얘기 좀 하자,며 시작을 한 거예요.


여러 차례 할 얘기가 있다고 핸드폰 좀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 듣고 있다고 "말하라"고 길래, 어쩔 수 없어서 참고 혼자 시작했어요. 마침 오전에 독서모임 가서 친구 엄마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 그걸 화두로 꺼냈죠.

“OO야, 너 용인 외고 가고 싶다며? 그럼 좀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알지? 너 아빠랑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는 것도 싫잖아. 엄마도 그동안은 빨리 아빠랑 화해하는 쪽이 해결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독서모임에서 어느 엄마 경험 들어보니 너무 성격이 상이한 부자 지간이라면 어려운 시기 부딪치지 않게 지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하더라고. 크면 다 깨닫게 된다고. 너 공부 열심히 해서 외고 기숙사 들어가. 그럼 아빠도 너 능력 인정하실 거고...” 그러면서 주저리 늘어놓고 있을 때였어요. 이런 말이 뭔지 아이가 모르지 않겠죠. 핸드폰 그만 보고 공부하라는 말이잖아요. 역시나 아이 반응이 신통치 않더라고요. 여전히 핸드폰에서 눈을 안 떼요. 화를 한번 누르고 그대로 방을 나왔어요.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고 9시 45분경. 다시 아이 방에 들어갔는데, 이번엔 친구와 오픈 채팅을 하면서 게임 사사를 받고 있더라고요. 제 아이를 피시방에 입문시킨 친구였어요. 수학학원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난 친군데, 한동안 집에는 학원 마치고 도서관 간다고 하면서 몇 주 그 친구를 따라 피시방에 들락거렸더라고요. 그 친구를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그 후 동네 피시방 사장님 찾아가서 주중 출입금지를 시킨 적이 있어요. 주말에만 허용하고요. 그때도 당시엔 아이가 화를 많이 냈는데, 이후에는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엄마, 그때 엄마가 주중 출입금지 안 시켰음 나 정말 중독됐을 거 같아, 라고요. 고마워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날도 제가 약간 세게 나가야겠다 싶어 친구가 듣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몇 마디를 퍼부은 거예요. “누구야? 아~너 PC방 입문시킨 그 친구구나?” 하면서 살짝 비아냥거렸어요. 제가 좀 치사했죠.


그랬더니 아이 안색이 대번 달라지더라고요. 입술에 손을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제가 멈추질 않았어요. 그제야 핸드폰을 종료하고 제 얼굴을 쳐다보더라고요. 싸움이 시작됐죠. 아이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저한테 마구 퍼붓고요. 그 더러운 입으로 그만 작작 지껄이라는 둥, 욕을 퍼부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일단 부모에게 욕을 쓴다는 것 자체에 이미 경악했겠지만, 막상 저를 무너뜨린 건 그다음 말이었어요.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엄마가 자기 꿈을 다 끝장내버렸다고요. 우리 집은 부자도 아니고 공부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요. 그래서 자기는 핸드폰이나 쳐하다가 죽어버릴 거라고. 너무 황당했죠. 이게 무슨 말이냐 했더니...


그날 캠핑 다녀오는 차 안에서 제가 최근에 들은 정신과 의사 하지현 씨와 사회학자 엄기호 씨가 나눈 유튜브 이야기를 들려줬었거든요. 겉으론 함께 캠핑 갔던 오빠와 얘기 나누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아이도 들으라는 식으로요. OO야, 너도 잘 들어둬. 요즘 교육의 현실이야, 하면서요. 내용은 대략 이런 거예요. 모두 공부, 공부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 인 서울이 아니면 대학에 가는 게 별 의미가 없다, 게다가 모두들 초등학교 때부터 재력으로 밀어붙여 갑자기 개천에서 용 나는 케이스도 드물다, 그러니 현실을 봐야 한다. 인 서울 대학 신입생 풀이 3만 5천 명이다. 우리나라가 최근 빈부차가 극심해지면서 만수르급 부자가 약 1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들의 자녀를 2-3명으로만 쳐봐도 ‘재력이 교육력이다 ‘라고 전제할 때 이미 그 안에서 게임 오버다, 근데 더 문제는 평균수명의 증가다. 예전에는 55세에 정년 퇴임하면 그동안 벌어놓은 걸로 65세까지 10년 정도만 살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평균수명 90을 넘었다, 가장의 수입 없이 30년을 지내야 한다. 그러니 일찌감치 공부로 승부할 아이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서 다른 아이 들러리 시키지 말고 차라리 학원비 아껴 연금저축이나 붓는 게 현명하다... 이게 골자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적당치 않은 내용이었을지 모르지만, 저는 아이가 공부에 승부욕이 강하고 지금 수학학원 들어가서 열심히 하고 있던 터라 이걸로 좀 자극이나 받으라고 한 소리거든요. 그리고 그날 이후 아이도 전혀 그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도 않았고요. 근데, 갑자기 핸드폰에서 눈 떼라고, 이제 공부 좀 해야 하지 않겠냐고, 친구랑 이렇게 하다간 또 땀을 뻘뻘 흘리며 저녁 12시까지 게임하다 씻지도 옷을 갈아 입지도 불을 끄지도 않고 널브러져 자지 않겠냐고, 그런 잔소리 하자마자 이 이야기를 물고 들어오는 건 뭐냐고요. 솔직히 제 눈에는 그날 ‘만수르’ 이야기를 끌어와 그러니 내 인생은 끝났고 그게 엄마 때문이다,라고 한 말은  빌미였던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 당장 친구랑 게임하는 걸 중단하고 싶지 않고, 그냥 드러누워 핸드폰 하는 걸 중단하고 싶지 않다는, 아주 말초적인 이유 때문에 끌어온 변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그러면서 서로 악에 받친 듣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말과 행동을 막 퍼부었던 거고요. 순간적으로 이게 다 핸드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저는 ‘핸드폰 자율 조절’이라는 원칙을 깨고 아이 핸드폰을 뺏었어요. 아이가 온몸으로 막더군요. 팔을 비틀고 벽에 밀어붙이고 잠시 몸싸움도 벌였지만, 일단 핸드폰 압수에 성공했어요. 이제 생각해보면, 대원칙에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었죠. 아이 감정이 가장 증폭됐을 때 멈추고 시간을 뒀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고, 이 시기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친구를 언급하며 모욕을 줬고요. 저도 억울했던 거 같아요. 내가 그동안 아빠 반대 무릅쓰고 너에게 이렇게 잘했는데, 내가 대화 좀 하자며 잠깐 핸드폰에서 눈 떼라는 걸 못해주냐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냐고.


사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늘 우리 부모가 문제 삼았던 것도 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거든요. 샤워하고 몸에 두르고 들어갔던 수건 며칠에 한 번씩이라도 밖으로 가지고 나와라, 잘 때 씻고 옷 갈아입고 자라, 어질러진 방 1주일에 한번 대충이라도 좀 정리해라, 침대 위에서 라면 먹지 마라. 입맛 없다고 라면 먹는 건 그래도 많이 양보했어요. 싸울 것도 많은데 그런 걸로 싸우지 말라고, 몇 달 먹다 보면 질려서 돌아온다고 주변에서 충고하길래요. 잘 때 방 불 끄고 작은 등 켜고 자라(무서워하니깐), 핸드폰 10시 이후엔 반납해라... 남편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건 이게 뭐 어려운 일이냐는 거예요. 다른 집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정말 무리한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우리 부모가 요구하는 가장 큰 원칙 -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하기 - 조차 포기하면서 저희도 이미 많은 걸 양보하고 살아오고 있기도 했고요.


암튼 그랬더니 애가 집을 나가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땐 감정이 북받쳐서 애가 나가서 어떻게 돼도 아무렇지도 않은 심정이었어요. 나가라, 했더니 핸드폰을 주면 나가겠대요. 저는 말했어요.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나가는 게 아니다. 단지 집에서 핸드폰 없이 생각이란 걸 좀 하길 바는 것이라고. 네가 굳이 나간다고 해도 핸드폰을 돌려줄 생각은 없다고.


그랬더니, 정말 나갔다가 자정 때쯤 들어오더라고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집에 있다간 애랑 다시 부딪칠 거 같아서 어디 카페라도 가 있으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애가 안방에 들어왔어요.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저에게 “후회하지 말고 이제라도 핸드폰을 내놓으라”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거절했죠. 네가 앞으로 엄마 얘기할 땐 핸드폰을 내려놓겠다, 약속하면 돌려주겠다고요. 약속하라고요. 근데 다짜고짜 내놓는 게 좋을 거라고만 하며 버티더라고요. 저도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핸드폰 만은 주지 않겠단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도망치듯이 나왔어요. 아이는 계속 제 핸드폰으로 전화하며, 또 욕을 퍼붓고 내놓으라고만 하고. 그렇게 실랑이하다 오후에 집에 들어왔는데 글쎄, 안방을 다 헤집어 놓았더라고요. 책장의 책을 다 빼놓고 서랍도 바닥에 엎어놓고.


방을 치우는데 애가 와서 또 요구했어요. 저는 단호하게 말했죠. “월요일에 주겠다. 그때까진 핸드폰 없이 생각 좀 하고 지내라.” 아이는 다시 광분하며 말했어요. “엄마가 핸드폰 없이 지내봤냐, 그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냐”. 저도 안다고 했죠. 저만 해도 핸드폰 없으면 생활하기 힘든 만큼 몸에 붙이고 사니깐요. 아침에 일어나서 네이버 뉴스 보며 잠을 깨고, 밴드에서 모임 약속을 잡고 후기를 올리고, 매달 계좌이체뿐 아니라 생필품 장보기에 쇼핑까지 다 핸드폰으로 하니깐요. 책 읽고 관련한 백과사전식 지식도 다 핸드폰을 통해 습득하고 유튜브 동영상으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고 있나요.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까, 너에게 잘 쓰라고, 이번 기회에 생각이라는 걸 좀 하라고 그런 거다,라고 항변했어요. 아이는 다시 분노하면서 후회하게 될 거라고, 핸드폰 돌려줄 때까지 안방을 이렇게 어질러 놓겠다고 했어요. 그리곤 저녁에 다시 집을 나갔어요. 나가면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비웃기까지 하더구요. “그래도, 현관 비번은 바꾸지 마라~" 하면서요.


저녁에 학원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어요. 재등록 기간이었는데,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렸죠. 부모가 아이에게 져주라는 게 애가 개망나니처럼 무신경하게 굴어도 다 용납해주란 얘긴 아닌 듯싶었어요. 대략의 이야기를 들으시던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이 녀석, 안 되겠네. 어머니 월요일까지 꼭 핸드폰 사수하시고요, 애한테 밀리지 마세요. “ 지지를 받으니 힘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학원은 재등록을 했어요. 애는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니 자기는 공부해도 소용없다고 하면서도 “그럼 수학 학원도 끊을까” 했을 때 “학원은 등록해주면 다녀는 주겠다”라고 일관되게 얘기하는 중이었거든요. 자존심 때문에 제발 다니게 해 달라고는 못하고, 그렇게 에둘러 표현했던 거죠. 애지중지하던 학원이나마 끊으면 정말 삐뚤어질 거 같아서 저는 재등록을 한 거구요.


그렇게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저는 둘째만 데리고 수련회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주말은 이렇게 버티면 되겠다 생각하고요. 아침에 준비하는데 아이가 들이닥쳐서는 다시 핸드폰을 내놓으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지지도 얻은 터라 월요일에 주겠다고 못을 박았어요. 애도 엄마가 이렇게까지 나오니까 당황한 거 같더라고요. 제가 이전까지는 좀 호락호락한 엄마였거든요. 이번에 사춘기를 겪으면서 왜 내가 이렇게 아이에게 지배력을 상실했을까, 곰곰 생각해봤는데, 저는 체질적으로 누가 누굴 지배하는 것 자체에 반감이 있더라고요. 그게 사회생활에서건 부부관계에서건 심지어 자식과의 관계에서도요. 누군가 보다 위에서 가르치려 드는 태도를 딱 질색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들과도 본의 아니게 이렇게 헐렁하게 지내게 된 것 같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저희 집을 잘 아는 친구 엄마랑 여러 차례 얘기해 봤는데요. 그렇다고 아이가 사춘기 전에 저랑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때야 저랑 아들은 거의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제가 아이의 예민한 부분을 어느 정도 미리 커버해서 문제가 생기기 전 소멸시킨 부분도 있었겠고요. 아이가 체질적으로 예민하고 완벽증 같은 기질이 좀 있잖아요. 가령 아주 어렸을 때, 서너 살 때쯤이었을 거예요. 이마트 가던 길에 차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도착해서 자던 아이를 일으켜 유모차로 옮기는 중에 아이가 잠이 깼어요. 대충 얼러 태우고 이동하는데 애가 뒤집어졌어요. 안아주려는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됐죠. '다시 에 돌아가서' 그때부터 자기를 '다시 안으라'는 거예요. 자라면서 그런 기싸움 정도는 했고, 그런 이상한 완벽증은 팽이나 장난감 같은 걸 샀는데 살짝 흠집이 나면 스스로 그걸 못 견뎌하는 정도의 양상으로 나타났어요. 그래도 잘 먹고 잘 자고 친구들이랑도 너무 잘 지내고, 늘 배려하고(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정말 늘 최고라고 하셨어요) 학교 가기 좋아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거든요.


참, 사회적 포지션에 강도가 높다는 거. 그건 일전에도 말씀드렸죠? 집에서 하는 것에 비해 학교에서 지나치게 모범적이라는 거. 그에 대해서는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학교 규칙을 잘 지키려고 나름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집에 가서 가장 편한 엄마에게 모두 푸는 게 아니겠냐” 말씀하셨고, 그래서 저도 ‘그래 학교에서 문제없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다는 거 정도? 저는 안팎 다른 것에 것에 반감이 있었는데, 아직 어린아이니까 그럴 수 있겠단 생각에 제가 좀 감수하자 했던 것은 있었어요. 그것 말고는 일찌감치 씻는 것도 졸업시켰고, 4학년 전에 알림장 체크하거나 준비물 안 가져가면 갖다 주는 것도 졸업했어요. 스스로 아쉬우면 고쳐가겠지, 하는 방향으로요. 제 생각에는 꽤 애들 독립적으로 많이 키웠던 거 같아요. 첫째는 아무리 챙겨줘도 여전히 안 챙겨간다는 이유로, 둘째는 아예 우리가 손 안 갈 만큼 잘 챙겨서 간다는 이유로  둘 다 일찌감치 손 뗄 수 있었죠. 기질이 80%라면서요? 나머지 20%의 성품을 어느 정도까지 보완해주느냐가 우리 부모의 몫이라는 말은 이미 아이 둘 키우며 절실히 느낀 바구요.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수련회 가는 날 아침 얘기하던 중이었지요. 글쎄 제가 그렇게 한눈파는 사이 아이가 제 방에서 제 핸드폰을 가져갔답니다. 지난번에도 한번 제 핸드폰 뺏긴 경험이 있어서 이번엔 정말 신경 쓴다고 쓴 건데도, 제가 이렇게 헐렁해요. 샤워하고 나온 사이 침대에 있던 핸드폰이 사라진 거죠. 아, 정말 그땐 어찌해얄지 모르겠더라고요. 아이 방에 갔어요. 자기 것을 내놓으면 내 걸 돌려주겠다고 하더라고요. 핸드폰 케이스에 5만 원 짜리도 2장 들었다며, 카드도 좀 긁어야겠다며. 빈정대기까지 하더라고요. 저는 호소했어요. 이러면 엄마 수련회 참석을 못하게 된다, 수련회에서 맡은 것도 있고, 유치부 아이들 케어도 하기로 했는데, 이러면 다 엉망 된다, 앞으로 엄마 교회도 못 다닌다. 아이는 더 의기양양해하더군요. 한편으론 자기가 막상 저지른 일이 너무 커서 약간 어리벙벙해 보이기도 했어요. 그래도 계속 퍼붓더라고요. 어차피 자기 인생은 엄마 때문에 종 쳤다, 엄마가 핸드폰 없이 지내봤냐. 자기가 핸드폰을 뺏겨서 이번에 얼마나 손해가 막심한 줄 아냐, 어제 애들끼리 모여서 놀자고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없어서 같이 못 놀았다. 엄마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핸드폰이 뭐라고, 그래 어제 애들이랑 한번 못논 게 그렇게 억울하니? 부모 가슴에 상처 내고, 이렇게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 만큼? 너한테 가족은 안중에도 없니?


아이는 추호의 망설임도 얘기하더라고요. “부모? 그게 뭔데?” 저는 부모도 아니라는 지요.  솔직히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어찌해얄지 몰라 다시 안방으로 와서 일단 화장을 마무리했어요. 버스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둘째라도 데려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주차장으로 내려왔는데, 둘째가 울면서 그냥 가면 안 되냐고 하더라고요. 이대로 핸드폰 없이 갈까, 싶은 마음. 없이 가더라도 애한테 월요일까지 절대 핸드폰은 주지 말잔 다짐. 다시 올라와 가방을 챙겨나가려다가 다시 한번 아이 방문을 열었어요. 불시에 열고 들어갔더니, 아이가 핸드폰을 황급히 가방으로 숨기더라고요. 돌려줄까 말까 애도 망설였던가 봐요. 저도 모르게 아이 팔을 잡았어요. 그리곤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 친정엄마께 핸드폰을 좀 뺏어달라고 부탁했죠. 수련회 가는 동안 강아지 봐주시러 올라와 계셨거든요.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할머니가 핸드폰을 가지고 나가자 애가 분노에 차서 저를 벽에 밀어붙이더라고요. 수련회엘 못 가게 하겠다고.


몸싸움이 시작됐어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광경이었죠. 아이가 나보다 더 작고 힘도 더 약한  걸 알면서도 저는 힘이 써지질 않았어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혼란스럽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순간 돈 내놓지 않는다고 친부모를 살해하고 도망친 개망나니 아들 이야기도 생각났어요. 저를 벽에 밀어붙이는 아이에게 말했죠. 너 이러다 엄마 죽일 수도 있겠다, 아이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며 마침 바닥에 있던 펜치를 집어 들더라고요. 건담 만들 때 쓰는 작은 펜치였어요. 다행히 바로 바닥에 떨어트렸어요. 그러다 정말 찌르겠다 싶었나 봐요.


그때까지만 해도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겠단 의지는 분명했어요. 여차하는 몸싸움 끝에 우리는 같이 현관문까지 밀려갔어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어요. 그 사이 우린 서로 힘이 풀렸고 아이가 버럭 저를 뒤에서 안더라고요. 그리곤 울부짖었어요. “핸드폰 돌려주면, 잘할게!” 하지만, 그 말이 진심으로 들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거죠. 저는 이미 심신이 너무 무너져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너무 늦었어. OO야. 우린 이제 끝이야.” 그리곤 울면서 둘째를 태우고 교회에 데려다줬어요. 둘째는 형님이 엄마 다치게 할까 봐 무섭다고 내내 울었고, 저는 아이를 달랬어요. 그 와중에도 계속 이대로 수련회로 도망쳐버릴까 생각했지만, 몸과 맘이 엉망진창이어서 도저히 용기를 낼 수 없었어요.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울음이 터질 거 같았거든요.


돌아온 집. 안방은 옷장 서랍부터 책상 서랍에 책장 전체에서 꺼내려진 책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마치 지진으로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 앉아 있는 기분. 아이가 경고했던 일이지만, 저는 설마 또다시 이럴 줄은 생각을 못했어요. 순간, 아, 나는 이 아이를 이길 수 없구나. 완패였어요. 겨울 잠바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 TV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건네주면서 말했어요.


 “미. 안. 하. 다.”


저의 싸움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저를 바보라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 짧은 싸움 끝에 알았어요. 저는 아이를 이길 수 없는 엄마라는 걸. 그리고 후회했어요. 아이 기 꺾어 보겠다고 하필 수련회 앞두고 싸움을 시작한 저를 원망했어요. 서로 못 볼 꼴 보고, 상황을 이렇게 악화시킨 나를. 모든 사람이 옳다고 지지한다고 그게 내 방식인 건 아니라고. 없던 의지 부리고 신경전 벌이는 이 방식이 저를 더 힘에 부치게 했더라고요. 핸드폰 좀 하는 게 어때서. 그러다가도 어느 날은 다시 정상으로 - 내 기준에 - 돌아오고, 못 참겠다 싶다가도 다시 참을 만 해지고... 평상시랑 크게 다를 바도 없었으면서, 좋게 넘어갔음 수련회도 가고 그러면 교회도 다시 나가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애가 교회 어른 들께 수련회 가자는 얘길 들으며 최근에 두세 차례 저한테 그랬거든요. “엄마 아무래도 다시 교회에 나가야 할 거 같아”라고요. ) 근데 제가 다 망쳐 놓은 거예요. 그것만 참으면, 그냥 여느 때처럼 넘어갔으면 다 좋았을 걸 괜히 덧낸 거라고.


늘 싸울 때마다 묻는 게 있었어요. “이게 의미 있는 싸움이냐”라고. 친구 엄마가 어차피 애들 핸드폰 1주일 뺏어봤자 돌려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할 때도, 이번처럼 확신 없이 주위의 충고에 따라 나와 다른 방식으로 싸울 때도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이게 정말 의미가 있는 싸움이겠냐고. 나는 자존심 따위는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욕 좀 얻어먹으면 어때요, 자식인데, 뭐 그런 건 하나도 괜찮았어요. 저를 아끼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불쌍하다고 너무 힘들지 않냐고 위로할 때도. 고민하고 애쓰는 건 물론 힘든 일이지만, 제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다만, 내가 지금 한 행동이 가장 최선인지, 그리고 어떤 게 가장 옳은 선택이지 잘 모르겠는 게 힘들지, 고민하며 나아가는 이 과정은 그것에 비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안방이 두 번째 어질러졌을 땐, 오히려 아이 걱정이 되었어요. 아이를 자꾸 악인으로 만드는 이 상황이. 나는 어디 하소연하고 조언을 구할 데라도 있지, 아이는 스스로도 감당 못할 짓을 자꾸 늘려놓고,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있을지. 제가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지나며 깨달은 게 있어요. 사람은 다 악하다, 지금은 그냥 서로 괜찮은 환경에서 만나니 선한 거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누구나 바닥 다 드러낼 수 있다. 그러니 최대한 그런 상황을 피하고 사는 게 현명한 거다. 그래 놓고 저는 이렇게 어린애가 바닥을 다 까발리는 상황으로 아이를 몰아붙인 거죠.


뭐 어쩌겠어요.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잘해보고자 했던 거니까요. 핸드폰 돌려준 것도 저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려고요. 서로에게 퍼부은 상처는 언제나처럼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그저 기도할 뿐이죠. 자기애가 강한 아이니까, 살아남으려다 보면 조금 자기 눈 가리기도 하겠지. 최악의 모습 부정하고 어느 정도 합리화하게도 해달라고. 그래야 여전히 희망을 품고 빛을 향해 나아가려 하지 않겠냐고. 또 이로서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이기는 게 되려 얼마나 씁쓸한 일인지에 대해서도요. 사람이 얼마나 악한 지도 돌아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내 안의 악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것도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젠가, 가장 적당한 시기에 주님, 깨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어요.


여기까지가 지난 3일간 제가 겪은 사건의 개요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사모님께 드리는 질문이에요.


제가 조언을 청했던 사람들은 이 이야기 끝에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으로 아이가 분노조절 못하는 것을 꼽았어요. 기본이 안되있다는 거죠. 아무리 화가 나도 부모에게 그러면 되나, 아무리 화가 나도 책장을 뒤엎는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아이의 심층에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전문가에게 치료를 좀 받아 봐라.  


하지만 저는 좀 달랐어요. 아까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화가 나서 제정신을 잃는 상황에선 누구나 광기에 가까운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더구나 아직 캐릭터가 정돈되지 못하고 가장 충동 조절이 안 되는 시기인 사춘기 때라면 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고요. 오히려 분노 조절 장애라고 언급한 부분에서는 아이의 승부욕을 엿보았어요.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던, 이기고 싶어 하는 아이의 기질을. 애가 아빠랑 싸울 때도 처음엔 아이가 말을 잘 못했거든요. 아빠가 무섭게 추궁하면 제 할 말을 다 못 했죠. 그래서 되려 아빠는 말 안 하고 버티며 수동 공격하는 아이 때문에 더 답답해했었는데.... 결정적으로 부자지간이 틀어지게 된 게, 마지막 두 싸움에서 아이가 아빠에게 대들었기 때문이거든요. “아빠가 싫고, 아빠랑 사느니 차라리 고아원에서 사는 게 낫겠다”라고 아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들었을 때. 남편은 충격을 받았지만 저는 그래도 아이가 입을 열고 자기표현한 것에 대해서 칭찬했던 기억이 나요. 남편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근데 아이가 아빠를 넘어서는 걸 보면서도 저는 솔직히 이 정도일지는 몰랐어요. 근데 이번 싸움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 퍼뜩 떠올랐는데 3일간의 싸움 중에 아이가 이런 말을 했었어요. 무슨 말싸움 끝에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엄마한테 지는 것처럼 될까 봐.” 그러곤 고집을 꺾지 않았죠.


아이와 사춘기 들어 싸움을 시작하면서 제가 구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을 온몸으로 깨달았다고 말씀드렸던가요? 구약에서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 중 하나가 하나님이 스스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잖아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말 좀 안 듣는다고 자기 백성에서 저렇게 저주를 퍼부을까. 저주를 퍼붓는 신에 대해 사람들이 욕할 때 저는 차마 항변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아요. 그만큼 사랑한 사람만이 그만큼 저주할 수 있다는 걸. 아이와 제가 한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서는 지금의 이 시기를 겪으며 저는 가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여정을 대입해 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좋은 것으로 주려는 하나님. 하지만 그의 자녀는 계속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지요. 순종하기만 하면 가장 최고의 것으로 주실 분임을 믿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불순종과 용서, 불순종과 용서... 또다시 불순종.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짓을 이 땅에 사는 동안 수도 없이 계속하고, 그러는 동안 세대는 죽고 다시 태어나길 반복하죠. 그러다 마침내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기를 그니다. 몇 백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 받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을 보내지요. 저는 저와 아이가 지금 딱 그 시기 직전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하나님도 그런 심정이지 않으셨을까, 감히 대입해봅니다. 이제 아이가 매일 컵라면 하나로 하루를 때우든, 밤새 핸드폰을 하든 상관치 못할 거 같아요. 그동안 너무 많은 음식을 차려뒀다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고, 좋은 것으로 제안했다 거절당한 탓이겠지요. 그리고 이건 저에겐 너무 자연스러운 제 마음의 행로인 거예요. 이래야지, 저래야지, 가 아니라요. 아이가 적극적으로 공부를 하겠다거나 과제와 진로에 대해 상의를 해도 예전처럼 쑤욱 들어가 제안하진 못할 거 같아요. 아뇨. 더 정확히 말하면 제안은 하겠지만 녀석에게 희망을 품진 않을 거 같아요. 너무 많은 배신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답니다. 녀석의 시간을 좀 더 좋은 것으로 채우기 위해 무리하면서 뮤지컬 표를 끊지도 못할 거 같고요. 딱 적당한 선에서, 가장 기본으로만 설계하게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잘 모르겠는 영역에 대해선 더 알아보지 않고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해버릴 거 같아요. 뭔가 부모로서 제재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아이 눈높이를 몰라서 하는 잔소리임을 인정하고 뒷걸음질 칠 거 같아요. 그래요. 제가 상처받았다고 조금은 인정할게요. 하지만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저보고 희생적이고 의지적인 훌륭한 모성이 되라곤 하지 마세요.


그저 여전히 제 안에서 맴도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그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일까 하는 거요. 하나님께서 불순종을 거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침묵하셨듯이 저도 아이 사춘기 끝날 때까지 몇 년간 침묵하라면 못할 것도 없겠단 생각이에요. 근데, 성경의 완성은 구약이 아니라 신약이잖아요. 정의의 하나님은 사랑의 예수님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 다시 한번 질문드려봅니다. 저는 이제 아이를 완전히 놓으려 하는데요. 이 결정이 ‘아이에게 져주라’는 대전제에 걸맞은 걸까요? 조언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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