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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ul 26. 2024

열심히 해야 밀어줄 거라는 거짓말

 공정이란 늘 남에게만 적용되는 무엇



가정에서부터 자본주의 논리가 어쩌고 궤변을 늘어놓자 친구가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  


"근데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야? 애들한테 말이야. 애가 열심히 하면 밀어주겠지만, 열심히 하지 않는데도 등떠 밀면서까지 밀어주진 않잖아. 그건 애를 망치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지. 애가 어느 정도 따라와야 우리도 계속 투자하게 되지 않아?"


흠. 그러게. 우리도 늘 아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대학까지는 너네가 공부하겠다면 밀어줄 거야. 하지만, 굳이 공부하지 않겠다는데 대학 가라고 하진 않을 거야." 내가 첫째 아들 학원을 왜 끊었던가?  맨날 다음 시험부터는 잘 보겠다고 하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학원에서 대놓고 자고 오기 시작하자,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열심히 하면 밀어주지만, 성과가 나지 않는데도 계속 쏟아붓는 건? 아들을 망치는 일이다.


적어도 내 주변 엄마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자식에게 쏟아붓는 사교육은 다 돈지랄이요, 무의미한 삽질이며, 에미의 욕망일 뿐이라고. 우리처럼 어설프게 투자해 봐야 어차피 강남 애들과 비교도 안된다고. 그리고 할 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공부하게 되어 있다고. 형편도 안되면서 무리수를 둘 필요까지는 없다고. 그래서 나는 몇 번의 경고 끝에 학원을 끊었다. 하지만 다들 돈지랄이라고 자조하면서도 실제로 자식에 대해 과감히 결단하는 집은 드물다. 강남 애들이 수천 만원짜리 입시 컨설팅을 받을 때 70만 원짜리 컨설팅이라도 받게 하고, 미국으로 유학 보낼 때 말레이시아 어학연수라도 보낸다. 자식에 대해서라면 실낱같은 가능성과 일말의 여지를 붙들고 끝까지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게 부모 아닌가. 독일에 유학 간 딸아이가 독일어 시험이 통과될 때까지가 4년이나 자신을 기다려준 부모의 경제력을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그렇게 원칙과 정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도 그때 정말 아들을 사랑했다면, 얼르고 달래고 마지못해서라도 아들을 계속 학원에 밀어 넣고, 될 때까지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아들은 지금 아무 밑천 없이 사회에 나가 정처 없이 방황하는 대신 아무 대학이라도 들어가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을까. 그게 자식에 대한 사랑이요, 도리였을까.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있는 이웃집들을 모조리 떠올려 봐도 정의로 사는 집은 거의 없다. 노력하지 않는 혹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식에게는 계속 투자하면 안 된다(정의)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투자한다(사랑). 자식의 상태나 의지나 요구와 상관없이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자본을 끌어모아 자식들에게 투자한다. 조부모와 남편 복 없는 여자들은 뒤늦게라도 학원비 벌러 식당이고 학원이고 물류 센터로 나간다. 진상 부모를 상대하며 우울증 약을 먹고, 파스를 붙이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식을 위해 물류센터에 나간다. 자식을 가진 이들 중 누구 하나 자식 교육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는 이가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정의라니. 공정이라니.


그리고 자식 교육을 위해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 다시 그 자식을 위해 아파트를 증여하고, 그 자식을 위해 사업체를 차려주면서도 나라에서 불우한 청년들을 위해 한 달에 몇십만 원만 지원해 주자고 하면 이렇게 말한다.


청년들이 일을 해서 돈을 벌게 해야지, 무상으로 수당을 주면 오히려 그들을 망치게 될 거라고. 점점 그것에 의존해서 일하지 않고 놀고먹게 될 거라고. 미국의 복지정책을 보라고. 그걸로 마약과 바꿔먹지 않느냐고.


내 자식은 알바 한번 하지 않고, 대학원까지 나와, 내가 차려준 건물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해도 되지만, 남의 자식에게 주는 수당은 나쁜 버릇을 들이게 하는 정책이라고. 그게 우리 사회 기득권들이 말하는 정의다. 정의란 나에겐 적용되지 않지만 남에게는 꼭 적용되어야 하는 무엇이다.


명절에 친척 어른들을 만나면 이런 논리를 가지고 적잖이 논박했다. 그들은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강남의 기득권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경기도 일대에 집 한채를 소유하지 못하고 내 아들은 유학 한번 보내보지 못한 세대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주는 한달에 몇 십만원의 용돈도 내 아들에게는 큰 격려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는 자식에게 공정하려 애썼던 내 친구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자식에게 돈 주면 자식 망칠까 봐 자식에게 투자하기를 망설였던 아버지가 내 친구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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