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야. 엄마, 나 좀 전에 사장님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엄마, 가게에 불이 났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지금 어딘데?"
"나 지금 여기와 있어.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어쩌지? 안에 연기가 가득해... "
울먹울먹 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엄마가 지금 갈게. 기다려 봐. 같이 들어가..."
새벽. 비몽사몽 중에 아들의 전화를 받고 시계를 봤다. 3시 40분. 부랴부랴 남편을 깨워 아들이 일하는 식당으로 달려간다. 대체 무슨 일인가. 불이 왜, 어느 정도로 난 거지? 불이 일으키는 거대한 재난을 상상하니 앞이 깜깜했다. 터널에 들어서는데, 아들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엄마, 그냥 돌아가.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 사장님이 내가 가게에 있으면 더 신경 쓰인다고 그냥 돌아가래. 내일 1시간 일찍 와서 같이 청소하쟤.
1시간 일찍 와서 같이 청소하쟤. 1시간만... 일찍? 다행히 크게 번지진 않았나 보다.
경황이 없어 자세한 얘길 전해 듣진 못했던 가슴이 조금 진정됐다. 큰 불은 아닌가 보다. 큰 불은 아니길... 제발. 알았어. 거기 잠깐만 기다려. 아빠 차 가져가니까 자전거 싣고 같이 돌아오자. 가게 골목에 들어서자 멀리 자전거를 질질 끌고 마주 오는 아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아들. 뭔가 든든하게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위중하고 아는 것도 너무 없었다. 아들이 입을 열었다. 연기가 많아서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일단 홀까지 불이 번지진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주방 안쪽으로 진입하다가 CCTV로 보고 있던 사장님이 돌아가라 해서 그대로 나왔다고. 아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어쩌다? 하는 내 눈길을 보았는지 아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마감할 때 맨 마지막으로 행주를 삶아 담가놓고 나오거든. 근데 행주 삶는 솥이 커서 불이 안 보였던가봐. 내가 불을 안 끄고 나왔대.
아... 그랬구나. 그래, 그래도 내일 와서 청소하자고 하시는 거 보니, 홀까지 번지진 않았나 봐. 너무 다행이다. 놀랬지? 천만다행이야.
다음 날. 아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다행히 소방차가 뜬 거 치고 피해규모는 미미했다. 행주 삶는 냄비와 근처에 있던 전자레인지 하나가 탔고, 소방대원이 문을 따느라 도어록 하나가 망가졌다. 하지만 연기 냄새가 가게 전체에 배어 손님을 받기엔 부적절한 상황. 어쩔 수 없이 실내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업자를 불러 대대적인 청소를 하기로 했다. 그러자 내친김에 연기로 그을린 후드까지 대대적으로 교체하기로 결정되면서 부득이 1주일 동안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
천만다행이라는 소리만 연신 나왔다. 사장님이 얼마 전 화재 보험을 새로 들어 이 모든 걸 보험으로 모두 충당하게 되었던 것도 뒤늦게 들었다. 그래도 가만있을 수 없어 저녁에 남편이 사장님을 찾아갔다. 남편은 당연히 망가진 도어록과 전자레인지뿐 아니라 일정정도 영업 손실에 대해서도 보상하려고 했지만 사장님이 극구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실수는 실수이니, 이에 대해 스스로 경각심을 갖게 하자는 의미에서 도어록과 전자레인지 값만 아르바이트비에서 깎는 것으로 결판를 보았다. 아들이 왜 사장님에게 홀딱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사소한 실수지만, 정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던 사안.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되자, 이번엔 아들의 심리가 걱정이 되었다. 그나마 안심인 것은, 큰일을 겪었으니 이제 살면서 사소한 부주의로 불을 낼 일은 없겠구나 싶은 마음 하나. 동시에 오래간만에 아들이 의욕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번 불이 아들을 뒷걸음질 치게 하는 계기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화재가 나기 전부터 사장님은 아들에게 살짝 운을 띄웠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가게를 전담할 실장을 하나 뽑아 주방을 맡기고 자신은 전체 식당을 조율하면서 홍보나 경영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그때, 아들은 무슨 근자감인지, 자신이 요리를 빨리 배워 실장을 하면 안 되겠냐고 의욕을 부렸다고 했다. 2달도 안된 주방보조가 실장이라니. 이제 겨우 파스타와 꼬치 몇 개 배운 열아홉의 네가? 6개월이라도 됐으면 모를까. 너도 그건 너무 성급한 생각인 거 알지? 요리 자격증이나 경력 하나 없는 애를 2달 만에 실장으로 올리는 곳은 아무 데도 없어.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아들은 그렇겠지? 하는 표정으로 내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이제 불까지 냈으니, 실장이고 뭐고 아들은 혹시 잘리는 건 아닌지, 이번 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사장님의 신뢰에 쩍, 금이라도 갈까 싶어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 단장을 하느라 1주일 동안 문을 닫고 다시 출근한 첫날. 12시. 사장님이 퇴근하자마자 혼자 가게를 지키던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부들부들 떠는 목소리로 아들이 말했다. 오늘 주방을 맡을 실장이 새로 왔는데, 자기 보다 한 살 어린애가 왔다는 것이다. 중국집에서 채소 좀 썰어 본 경력이라는데, 맘에 안 드는 것이 분명했다.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현란하게 칼질을 해대길래 조심하라고 그리 말했건만, 자기 말을 귓등으로 듣더니 첫날부터 손가락을 베었다질 않나. 엄마, 심지어 걔 몸에서 냄새도 나. 사장님은 그 애랑 나랑 일단 함께 요리를 배우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그래. 나는 홀도 봐야 하는데. 일단 걔가 주방을 맡아야 하니까 나는 요리를 배울 틈도 없어. 사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앨 뽑으신 걸까. 애가 배우려는 의지도 별로 없어 보여. 처음 왔으면 눈치껏 좀 해야 되는데, 그냥 계속 멀뚱하니 서있기만 하고. 그동안 사장님이랑 얼마나 잘 맞춰 재밌게 일했는데... 얘랑 하면 엉망일 게 빤히 보이는데... 사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애를....
전화기 너머로 아들의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아들이 그동안 이 일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사장님에 대한 신뢰가 컸던 만큼 배신도 컸을 것이다. 애정이 없었다면 실망도 없었겠지. 속상해하는 아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